그는 '딴따라'였다. 오랜 세월 밤무대에서 기타를 쳤고, 전자오르간을 연주했다. 젊었을 때는 '대학생 악사'라고 인기도 좋았다. 세상의 시선이 따뜻하지는 않았지만 벌이는 꽤 괜찮았다. 그러나 은행 통장은 항상 마이너스였다. 대학교수가 된 지금도 수억원의 빚이 그의 어깨를 짓누른다. 모두 그를 삼촌으로 부르며 따르는 아이들 600여 명을 키워낸 '대가'였다. 아동복지시설 공동생활가정(그룹홈)인 '등불의 집'을 27년째 지키고 있는 김진태(58) 대표는 그걸 '운명'이라고 했다.
◆밤무대 악사의 남모를 선행
김 대표가 오갈 데 없는 청소년들의 '대부'(代父)가 된 것은 취미로 시작했던 음악이 계기였다. 대학 시절 아르바이트 삼아 유흥업소 밴드에서 일하면서 양로원 위문 공연을 다닌 게 그 시작이었다.
"고등학생 때 기타를 배웠는데 하루는 기타학원 원장에게서 급히 연락이 왔습니다. 야간업소의 기타리스트 빈자리를 메워달라는 부탁이었죠. 연주는 못 해도 좋으니 무대에서 폼만 잡아달라고 하더군요. 재미삼아 시작했는데 가끔 양로원에 위문공연도 갔습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나이 서른에 다시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사회복지에 대해 공부해보자는 의욕은 대구소년원 자원봉사로, 다시 복지시설 설립으로 이어졌다. 1986년 대구소년원에 윤리과목 교사로 자원봉사를 나간 게 인연이었다.
"당시에는 소년원에서 퇴원하려면 보호자가 있어야 했는데 현수(가명)가 자신은 보호자가 없어 퇴원을 못 한다며 제게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제가 데리고 나가서 칠성시장에서 노점상을 하던 현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현수를 키울 형편이 못된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하루만 같이 자보라고 했는데 다음 날 현수가 데려가 달라고 다시 전화했지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현수의 실망이 너무 클 것 같아 저희 집으로 와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현수는 당시 소매치기 3범이었다. 전과 경력에다 삐뚤어진 성격 탓에 사회 적응이 당연히 쉽지 않았다. 김 대표가 어렵게 직장을 구해주면 얼마 안 돼 사고를 쳤다. 하지만 지금은 어엿한 한 가정의 가장이고, 번듯한 직장도 다닌다.
"현수가 나중에 '엄마까지 포기한 나를 끝까지 믿어줘서 마음을 잡았다'고 털어놓더군요. 저도 현수가 그렇게 변할 줄은 미처 몰랐는데 말이죠. 결손가정 출신의 비행청소년들은 소년원을 나와도 갈 곳이 없어 다시 범죄에 빠지게 된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그래서 불우 청소년들에게 따뜻한 가정을 제공하고,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자 싶어 '등불의 집'을 열었습니다."
'등불의 집'을 거쳐 간 청소년들은 대부분 '문제아 중의 문제아'로 꼽힌 아이들이었다. 김 대표의 자상한 보살핌 속에서도 가출을 밥 먹듯이 해서 그의 속을 새카맣게 태우곤 했다.
"진구(가명)는 우리 집에 몇 년 있는 동안 48차례나 가출했어요. 그때마다 제가 전국을 샅샅이 뒤져 찾아내 데려왔지요. 그런데 만약 제가 47번만 찾고 마지막에 포기했다면 어떻게 됐을지 생각하면 아찔합니다. 지금은 대학까지 나와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의지와 신념만 있다면 어디 숨어 있어도 찾을 수 있습니다. 바위를 다듬어 바늘을 만든다는 각오로 말입니다."
◆직접 낳아 기른 부모의 심정으로
'사고뭉치들의 대부'인 김 대표는 무의탁 비행청소년, 요보호 청소년들을 위한 일에 평생을 바쳤다. 그가 참고하라며 건넨 이력서에는 1988년 이후 봉사활동 경력만 3페이지가 넘게 소개돼 있었다. 현재도 대구가정법원의 위탁보호위원 상임이사'국선보조인, 대구지검 형사조정위원 및 학교폭력 선도 강연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제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 가운데 하나는 혹시 제게도 어두운 과거가 있지 않으냐는 것입니다. 마치 '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처럼요. 허허허. 하지만 저는 진짜 모범생이었어요. 글 쓰는 걸 좋아하는 문학도이기도 했고요. 남들은 왜 사서 고생하냐고 말하지만 저에게는 우리 아이들과 함께 사는 것 자체가 행복입니다. 처음에 엉뚱한 짓 한다고 반대했던 가족'친지들도 이제는 다들 이해해주십니다."
어떠한 대가를 바라고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아쉬운 대목도 없지는 않다. 지금까지 '등불의 집'을 거쳐 간 청소년 600여 명 가운데 상당수가 이곳을 나간 뒤 연락이 닿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낳아 기른 부모의 심정과 하나도 다를 게 없어 보였다.
"27년간 '등불의 집'을 운영하면서 아이들에게 제 손으로 밥을 해먹이지 않은 날이 며칠이나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제게는 소중한 아이들이죠. 하지만 이 각박한 세상에서 우리 아이들이 살아남기는 참 힘든 것 같습니다. 저희 집에 오는 우편물 가운데 상당수는 좋지 않은 소식들이거든요. 때로는 우편배달부 보기가 민망할 때도 있어요."
복지전문가로서 우리 사회에 하고 싶은 이야기도 많았다. 사회복지제도가 촘촘히 갖춰지는 것은 좋지만 효율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는 지적이었다.
"우리 청소년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국가와 국민이 돌봐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는 기관'단체들의 발걸음은 으레 큰 복지시설로만 향하더군요. 또 복지 혜택을 받는 쪽도 사회에 대한 책임감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대학에 갈 수 있는 것도 장학금 지원을 받기 때문인데 졸업하면 그 금액을 환원하는 방향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그래야 진정한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 할 수 있겠죠? 또 그런 돈이 모이면 다른 취약계층도 도울 수 있을 겁니다."
◆등불패, 세상을 밝히다
김 대표는 지난해 9월 '제13회 사회복지의 날' 기념식에서 국민포장을 수상했다. 2005년에는 청소년위원회로부터 제1회 청소년푸른성장대상 복지 부문을 받기도 했다. 위기의 청소년들을 예'체능 교육을 바탕으로 전문 예술인으로 성장시켜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한 공로다. '등불의 집' 출신 가운데 10여 명은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다.
현재 머물고 있는 아이들과 퇴소해 자립한 선배들로 구성된 '사물놀이 등불패'는 사회 곳곳에 희망과 용기를 전하면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 1996년 창단 이후 숱한 대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알려지면서 요즘에는 연간 100차례 이상 공연을 다닌다. 지금까지 50여 차례 해외 공연도 다녀왔는데 올해 대구시청의 중국 닝보 방문 때에도 동행해 큰 박수를 받았다.
"처음에는 피아노와 같은 서양 악기를 가르쳤습니다. 아이들의 심리적, 정서적 안정과 순화를 위해서였지요. 하지만 아이들에게 감동을 주지는 못해 대안으로 국악을 선택했습니다. 제가 가야금을 배운 적이 있거든요. 김덕수 사물놀이패 단원들도 저희 집까지 와서 아이들을 가르쳐주셨고요. 내세울 게 하나도 없던 아이들이 음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니까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가운데 일부 아이들은 전문 음악인으로 성장했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쉬웠던 일은 물론 아니다. 한때의 잘못으로 소년원에 수감되는 등의 아픈 과거를 가진 아이들은 악기를 다루는 데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빚을 내어서 장구, 북, 대금, 가야금 등 악기를 사줬지만 연습은커녕 도망가기 일쑤였다.
"애들의 불만이 적지 않았죠. 남들은 다 놀러가는 여름에도 무더운 집안에 틀어박혀 밤새 연습을 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이곳 출신 선배들이 함께 마음을 나누면서 아이들도 흥을 갖게 됐고, 자신의 힘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 과거의 좌절과 어두운 기억들을 떨쳐냅니다."
초'중'고교에 다니는 학생 7명이 김 대표와 함께 생활하는 '등불의 집'은 그러나 조만간 또 이사를 가야 할 형편이다. 3층에 마련된 풍물놀이 연습장도 없어질지 모른다. 6년 전 지인들의 도움과 빚을 내 지은 집이지만 은행 부채 때문에 운영이 어려워 매물로 내놓았기 때문이다.
◆김진태 대표는
김 대표는 1955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경신중'성광고를 거쳐 대구공업전문대학 건축과, 경북실업전문대학 사회복지과, 상주대 사회복지과를 졸업했다. 상주대에서 사회복지 전공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대구미래대학 겸임교수를 맡고 있다. 밤무대 악사는 몇 년 전 그만뒀다.
김 대표는 "어렸을 때부터 남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는데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늘 더 어려운 이웃에게 베풀며 사신 어머니의 영향이 큰 것 같다"며 "복지 분야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글 쓰는 직업을 가졌을 것 같다"고 귀띔했다.
'등불의 집' 운영 경험 등을 담은 '진태 삼촌의 12손가락' '날개를 찾는 아이들'이란 저서를 낸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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