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메디치 효과

언제부턴지 여러 분야에서 부쩍 자주 들리는 용어가 있다. 이른바 '융합학문'이란 것인데 대략의 뜻은 그저 미루어 짐작하지만 정확히 설명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은 유명 정치인이 된 어느 대학의 융합과학 교수에게 누군가가 도대체 '융합'이란 게 뭐냐고 물었다가 "영어로 컨버전스(convergence)라고 합니다"라는 짧은 대답에 당황했다는 일화도 있다. 사실 딱히 더 쉽게 바꿀 만한 단어도 없거니와 그렇다고 새로운 개념은 더욱 아니다.

이야기는 멀리 중세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제국이 둘로 갈라진 후 단명했던 서로마제국에 비해 동로마제국은 천 년 넘게 번창했다. 수도는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 이스탄불)였고 제국의 이름은 비잔티움이라 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에게해의 무역로에 자리 잡고 있어 수세기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내전으로 인해 제국은 쇠퇴했고 1453년 오스만튀르크족의 침공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함락되고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당시 비잔티움에서 문화와 문명의 꽃을 피웠던 수많은 예술가, 과학자, 건축가, 철학자, 상공인들은 튀르크족에 쫓겨 서쪽으로 가다가 이탈리아의 아펜니노 산맥을 넘어 피렌체로 모여들었다. 집과 일터도 없는 이들을 받아준 곳은 피렌체 제일의 부호 메디치 가문이었다.

이렇게 모여든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메디치 가문은 아낌없이 후원하였고, 이것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것이 바로 '융합'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분야가 한곳에서 만나 같이 어우러지고, 거기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오늘날 '메디치 효과'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요즘 융합이란 말이 새삼스럽게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각각의 분야는 나름대로 많이들 발전하였는데 발전과정에서 다시 세분화되는 과정을 되풀이하다 보니 지금은 초(超)세분화가 된 실정이다. 그래서 현재 단계에서 미래에 창조적 혁신을 바란다면 그 열쇠는 융합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여러 분야가 융합하도록 도와주기만 하면 르네상스를 탄생시켰던 메디치 효과가 일어날까? 여기엔 커다란 걸림돌이 있다. '모여 드는 사람들'의 처지가 다르기 때문이다. 중세의 메디치가에 모였던 사람들은 자신의 집도 일터도 잃어버렸기 때문에 내 것 네 것을 따지지 않고 서로의 장벽을 쉽게 허물었다. 자신의 영역과 기득권을 고집하지 않았기에, 아니 고집할 수도 없었기에 서로가 자연스럽게 융합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가 메디치 효과를 진정으로 바란다면 일단 모여든 각자가 스스로를 둘러싼 견고하고 두꺼운 담을 허무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또 다른 르네상스가 열릴 것이다.

정호영 경북대병원 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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