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건강편지] 무덤가에서 생긴 일

오스트리아 비엔나에 가면 중앙묘지라는 곳이 있다.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많은 유명한 음악가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다.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부자 등. 심지어 공동묘지에 매장되는 바람에 정확한 무덤 위치를 알 수 없는 모차르트의 경우, 무덤 대신 기념비를 세워놓았다.

몇 해 전 의사 친구 몇 명과 함께 비엔나에 여행을 갔다가 음악가의 묘지에 들른 적이 있었다. 거기서 우리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베토벤이 왜 죽었는지 알아? 베토벤은 매독으로 죽었어." "아니야. 베토벤은 매독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알코올성 간경화로 죽었다구." "그러면 슈만은 왜 죽었는데?" "슈만은 정신병으로 죽었지."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는 정확한 사망 원인을 잘 몰라. 모차르트의 사망 원인으로 108가지나 되는 학설이 있다구."

이렇게 우리끼리 한참 대화를 나누는데 그 자리에 동행했던, 비엔나에 오래 살았던 교민이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우리를 쳐다보더니 이런 말을 한다. "내가 비엔나에 20년 넘게 살면서 음악가의 묘지에 수도 없이 와봤지만 음악가의 묘지에서 음악가들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처음 봅니다. 역시 의사는 의사군요."

전공의(레지던트) 선생들과 주말에 가까운 계곡으로 소풍을 다녀온 적이 있다. 평소 병원에서 밤낮없이 바쁘게 생활하다가 밝은 대낮에 세상 속으로 나오니 다들 즐겁고 들뜬 기분이다. 그런데 언덕길을 한참 오르던 한 전공의가 이런 얘기를 한다.

"아이고 힘들어. 마치 심폐소생술 30분 한 것만큼 힘드네." 산길을 걷는 고단함도 심폐소생술의 고단함에 비유를 할 만큼 모든 것을 진료에 빗대어 비교하는 모습을 보고 철저하게 군기(軍紀)가 아닌 의기(醫紀)가 충만한 것 같아 우습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TV나 영화, 오페라를 봐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드라마나 영화에 의사나 의학에 관한 이야기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저 병은 저렇게 치료하면 안 되는데. 아니! 저건 의학 자문도 안 받고 대본을 썼나? 영 엉터리잖아." 드라마나 영화는 어차피 허구이므로 그 자체를 즐기면 되는데 의사들은 여기에서조차 직업의식을 발휘해 재미를 놓치는 경우가 많다.

흔히 이런 말을 한다. '구두 장수는 남들 신발만 눈에 띄고, 양복장이는 남들 옷 입은 것만 눈에 들어온다'고. 의사들은 음악가의 무덤에 가서도 음악가의 사인을 논하고, TV나 영화를 봐도 쉽게 그 흰 가운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고질적인 직업병 환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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