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학의 유구한 맥을 이어온 대구경북에는 뛰어난 한의사들도 많았다. 조선시대는 물론 구한말과 한의사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던 일제 강점기에도 이들의 활동은 면면히 이어져 왔다. 이루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한의학 발전과 지역 환자들을 위한 의술을 펴는 데 기여했지만 이번 기회에는 지면 사정상 빼어난 한의사 3인의 삶을 짚어본다.
◆석곡(石谷) 이규준(1855~1923)
이규준은 경북 영일군 동해면 임곡리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형편 탓에 학문을 닦을 여유가 없었지만 뜻을 품고 스스로 공부해 유학, 한의학, 천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학문적 업적을 이뤘다. 사상의학으로 유명한 이제마(1837~1899)와 함께 조선 말기 유학자로서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평가받지만 대중에게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상의학이 널리 알려진 데 비해 이규준이 완성한 의학이론인 부양론(扶陽論)은 일부 전문가를 제외하고는 아직 널리 알려져있지 못하다. 사상의학이 체질에 따른 조화를 중시하는 중용(中庸) 의학이라면, 부양론은 생명의 근원인 양기(陽氣)는 항상 부족하기 쉬운 데 비해 음기(陰氣)는 남아돌기 때문에 모든 병의 원인에는 양기 부족이 있다는 입장이다.
결국 양기를 북돋워줘야 병이 낫는다는 것이 부양론의 핵심이다. 그는 질병 때문에 밀려나는 양기나 생명력이 제자리를 찾도록 독성을 지닌 약재인 부자(附子)를 거침없이 사용했다. 때문에 석곡 이규준은 부자를 적극적으로 잘 활용해서 병을 고친 것으로 유명하다. 후세 한의사들은 그 과감함에 기가 질릴 정도라고 표현한다.
특히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의학 연구에도 매진한 실학자였다. 당시 신성불가침이던 주자의 학설을 비판해 유교경전 13경에 독자적인 주석을 달아 조선 유림을 들끓게 만들었다고 한다. 의학경전인 '황제내경'에 주석을 달아 중국 의학을 숭상하던 조선 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대표적 의학서로 '황제내경'의 핵심 내용을 간추린 '황제내경 소문대요'와 직접 저술한 '의감중마'가 있다.
의중감마는 평소 주창하던 부양론과 기혈론(氣血論)과 통하는 부분을 '동의보감'에서 발췌해 간행한 것으로 우리나라 한의학계에서 매우 소중한 의서로 꼽히고 있다. 서병오(석재), 이원세(무위당), 배을제, 조규철 등의 제자를 배출했다. 석곡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무료로 처방해주었으며 움막을 만들어 나병환자를 모아두고 치료해 주었다.
◆무위당(無爲堂) 이원세(1905~2001)
1905년 경북 청도에서 가난한 농군의 맏아들로 태어난 무위당 이원세는 스스로 유학을 공부했다. 수업료를 낼 형편이 못돼 스승을 찾아다니던 중 우연한 기회로 당대 대학자였던 석곡 이규준을 만나게 됐고, 인연이 닿아 석곡은 무위당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무위당은 당시 대구의 유력자였던 석재 서병오의 집에 몸을 맡기고, 낮에 일하고 밤에 공부하는 힘겨운 생활을 시작했다. 석곡이 한 달에 두어 차례 석재의 집을 찾아와 무위당을 부르면 그간 궁금했던 것들 중에서 몇 가지를 골라 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런 어려움 속에도 무위당은 배움에 대한 은근과 끈기로 스승의 학맥을 잇는다.
이후 무위당은 6년 7개월간의 문하생 생활을 마감하고 20대 후반의 나이에 고향인 청도로 돌아와 한약방을 열었다. 나이가 어려 처음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던 사람들도 1년 만에 그를 명의로 인정했다. 나이 많은 약종상들도 가족들의 난치병 치료를 무위당에게 맡길 정도였다. 이런 명성 덕분에 비록 시골 한의사였지만 3년 만에 집안을 일으켰다.
일제의 수탈 속에 산으로 피신하기도 했던 그는 해방 후 대구에서 '무위당한의원'을 열었고, 대구에서 제2회 한의사시험을 치르고 정식 한의사가 됐다. 환자들이 몰렸지만 물질을 좇기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 치중했다.
피로 회복이나 몸보신을 위해 약을 지으러 오면 "밥 잘 먹는 것이 보약"이라며 타일러 돌려보냈다. 대신 난치병 환자의 진료에 매진하며 하루에 10여 명도 채 안 되게 받았다.
환자와의 진솔한 대화로 원인을 찾고, 세밀한 처방으로 난치병을 완치시켰다. 똑같은 처방을 쓰지도 않았다. 증상이 같아도 병의 원인이 다르며, 모든 병은 마음에서 온다고 했다.
무위당은 제자들의 간절한 청으로 생전에 두 권의 책을 남겼다. 스승이었던 석곡 이규준의 처방을 전국에서 모아 편집한 '신방신편'과 석곡의 저서 '의감중마'에 고금의 처방을 편집해 넣은 '백병총괄 방약부편'이다. 주위 사람들에게 늘 "구름같이 살라"고 말했던 무위당은 2001년 8월 18일 노환으로 기력이 쇠잔해 96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혜산(慧山) 조경제(1922~2012)
대구 사람들에게 흔히 '성서 조약국'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혜산 조경제가 환자를 진료하던 흥생한의원이다. 변변한 약국이나 병원이 없던 60년 전 현 달서구 감삼동에 있던 유일한 의료기관이 바로 흥생한의원이었다.
혜산은 1922년 경북 달성군 달서면 감삼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0년 보통학교에 입학해 2년 6개월간 하루도 빠짐없이 다녔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에다 심한 홍역을 앓고 몸이 약해져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뒤늦게 배움에 대한 열정과 한의사의 꿈을 품고 31살에 대구 동양의학전문학원의 문을 두르렸고,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가난한 형편 탓에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야간부를 다녀야 했다. 1954년 3월 2년 6개월의 야간부 전문학원을 졸업한 그는 7월 제4회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했고, 12월에 고향인 감삼동 193번지에 흥생한의원을 열었다.
혜산은 매일신문과의 생애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환자에 대한 열정을 보였다. "60년 넘게 한순간도 진료를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자정이나 새벽에도 왕진이나 진료가 있으면 달려갔고, 일주일 내 몇 시간 못 자고 진료하기도 했습니다. 저를 찾아온 사람인데 어떻게 진료를 외면합니까? 지금도 하루에 수십 명을 진료합니다."
악필을 교정하기 위해 30대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50여 년을 쉼 없이 썼다. 1990년까지 쓴 일기는 '내 고향 감삼골 1'2'라는 책으로 나왔고, 1991년부터 2008년까지 쓴 일기는 회고록인 '홍안'으로 출간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를 쓴 이유에 대해 "너무도 가난했기 때문에 힘들고 외로운 삶을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일기였다"고 했다.
의업을 통해 번 돈을 남을 위해 베푸는데 아끼지 않았다. 동사무소에 야학을 설립해 문맹자들을 가르쳤고, 아껴서 모은 돈으로 황소 10여 마리를 사서 가난한 농가에 주기도 했다.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장학회를 설립했고, 노인들을 위해 경로당도 기증했다. 혜산은 고향에서 60년간 꾸준히 인의를 실천하다가 2012년 12월 24일 90세로 생을 마감했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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