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경북人 세계인In] (8)스웨덴 스톡홀름 김태자 박사

인간미 별로 없는 의사-환자 관계…한국의 情으로 녹여 친구 만들었죠

※김태자 박사는 1945년 5월 안동 길안에서 안동 김 씨 가문의 5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23세 때인 1968년 스웨덴으로 유학, 카롤린스카 왕립의과대학에 동양인으로서는 홍일점으로 입학했다. 1975년 졸업 후 카롤린스카 대학병원에 들어가 20여 년간 근무하다 스톡홀름 시내에서 자신의 병원을 열었다. 최근에는 자신의 집에 진료실을 열고 계속해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2011, 2012년 스웨덴 한인회 34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재스웨덴 한인과학기술자협회장을 맡고 있다.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김태자 박사는 1945년 5월 안동 길안에서 안동 김 씨 가문의 5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23세 때인 1968년 스웨덴으로 유학, 카롤린스카 왕립의과대학에 동양인으로서는 홍일점으로 입학했다. 1975년 졸업 후 카롤린스카 대학병원에 들어가 20여 년간 근무하다 스톡홀름 시내에서 자신의 병원을 열었다. 최근에는 자신의 집에 진료실을 열고 계속해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2011, 2012년 스웨덴 한인회 34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재스웨덴 한인과학기술자협회장을 맡고 있다.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사회민주주의 국가인 스웨덴에서 환자와 의사는 철저하게 계약의 관계이다. 의사가 한 환자를 상담하고 진료해야 하는 최소시간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한 환자당 배정된 시간은 20분. 의사는 이 시간 이상 환자를 진료하고 상담해야 하고 이를 지키지 않았을 경우 고발을 당할 수도 있다. 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제도이다. 하지만 이를 뒤집으면 의사는 환자가 더 궁금한 것이 있더라도 이 시간 이상 상담해 줄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스웨덴 의사는 이 시간만 지나면 환자를 돌려보내 버린다. "그 질문은 지금 할 수 없습니다." 환자는 더 궁금한 게 있더라도 다음 진료 약속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같은 관계에 '인정'이 개입될 여지는 많지 않다. 제도로 인해 의사와 환자 사이에 인간미가 사라져 버린 것이 오늘날 스웨덴의 현실이다. 의사가 인술의 제공자가 아닌 의학지식의 전달자, 시행자일 뿐이라고나 할까. 공짜나 다름없는 진료비 덕에 손끝에 박힌 가시 하나도 의사에게 맡기는 스웨덴이지만 환자들은 여전히 가려운 곳이 많다. 환자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의사가 그립다. 자신의 아픔에 공감해주는 의사를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스웨덴의 여성 환자들은 한국인 의사 김태자(68) 박사의 진료실을 찾는다.

◆ 한국의 인정, 스웨덴을 사로잡다

한 번 고객(환자)은 영원한 고객(환자)! 김 박사의 환자들에게 그는 영원한 주치의이다. 한 번 김 박사의 진료를 받은 사람들은 결코 그를 떠나지 않고 계속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수십 년의 관계를 통해 친구처럼 지내는 사람들도 많다. 20여 년을 재직한 카롤린스카 대학병원 시절부터 이어온 인연들이다. 예란 페르손 전 수상의 부인도 김 박사의 오랜 환자이자 친구이다.

"스웨덴과 한국의 정서는 아무래도 좀 다른 면이 있습니다. 철저히 개인주의적인 이곳 사람들이지만 정을 받았을 때 느끼는 게 많은 것 같습니다. 저는 시간의 한계 때문에 정해진 상담시간 안에 모든 답변을 해주지 못할 경우 남은 질문을 적어두고 돌아가게 했어요. 진료가 끝난 저녁시간 다시 그 환자의 집으로 전화를 해드렸죠. 그러다 보면 자연히 진료 외에 친밀한 대화도 오가기 마련이죠. 그렇게 환자로서, 친구로서 유대를 단단히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인간관계가 냉정하다는 스웨덴에서 김 박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은 바로 한국의 '정'이었다.

◆꿈을 찾아 결행한 스웨덴행

처음 마주한 그의 모습에서 강한 여성이란 이미지는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또박또박한 말투로 '~습니다'로 끝나는 화법 정도랄까. 곱게 양장을 차려입은 모습은 조용하고 인자한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 같기도 했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웃을 때는 소녀 같은 수줍음마저 살짝살짝 비친다.

어떻게 이런 분이 고향에서 그렇게나 떨어진 타국 땅까지 와서 공부할 염을 내었을까. 그 자그마한 몸에서 어찌 그런 강단과 열정이 나왔을까.

김 박사가 스웨덴에 첫발을 디딘 것은 20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의 스웨덴행에는 10여 년째 스톡홀름에서 살고 있던 큰오빠 김정한 씨(1992년 작고)의 영향이 컸다. 대구 경북고등학교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58년 스웨덴 정부 장학금을 받으며 일찌감치 유학길에 오른 김 씨는 이미 스웨덴 정부에서 요직을 맡고 있었다. 오빠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카롤린스카 왕립의과대학에 들어간 김 박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의학도의 꿈을 펼칠 수 있게 된다.

"노력만 하면 무엇이라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 있었어요. 하루 10시간 이상을 공부에 매진했었죠. 나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두려움 같은 건 별로 없었던 것 같아요. 교수님이나 선후배들의 배려도 많이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유일한 동양인 여성이었거든요."

◆영원한 한국인, 안동은 제1의 고향

김 박사의 스웨덴 생활은 45년, 결혼도 스웨덴 사람과 했다. 대학 1학년 때 가장 친했던 친구의 오빠를 만난 게 40여 년의 인연이 되었다. 이런 김 박사는 스웨덴인일까, 한국인일까.

"당연히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결혼과 함께 자동적으로 국적은 스웨덴이 되었지만 정신은 영원히 바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여행을 가면 스웨덴의 자연이 한국 안동의 그것보다 왜 더 아름다운지 이해가 되지 않거든요. 안동은 저에게 있어 제1의 고향인 걸요."

부군인 마츠 비요르클룬드(Mats Bjorklund) 씨의 한국 사랑도 김 박사에 못지않다.

"한국의 자연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특히 안동 길안은 참 평화로운 곳입니다. 한국 음식도 정말 사랑해요. 김치, 고추장 등 매운 것도 좋아해요. 딱 한 가지, 멸치만 빼고요. 멸치가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날 바라보는 것 같거든요. 하하하."

은퇴 계획을 묻는 질문에 김 박사는 손사래를 쳤다. "아직 충분히 일할 힘이 있는데 그만둘 이유가 있나요. 월요일이 되면 또 나를 기다리는 환자들이 올 텐데요."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글'사진 홍헌득기자 duckdam@msnet.co.kr

※김태자 박사는

1945년 5월 안동 길안에서 안동 김 씨 가문의 5남매 중 셋째딸로 태어났다. 23세 때인 1968년 스웨덴으로 유학, 카롤린스카 왕립의과대학에 동양인으로서는 홍일점으로 입학했다. 1975년 졸업 후 카롤린스카 대학병원에 들어가 20여 년간 근무하다 스톡홀름 시내에서 자신의 병원을 열었다. 최근에는 자신의 집에 진료실을 열고 계속해서 환자를 돌보고 있다. 2011, 2012년 스웨덴 한인회 34대 회장을 지냈고, 현재는 재스웨덴 한인과학기술자협회장을 맡고 있다. 슬하에 2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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