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숙(63'대구 동구 율하동) 씨의 방은 대낮인데도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허리를 잔뜩 구부린 채 걸어나온 김 씨는 불을 켜면서 "평소에는 불을 끄고 산다"고 했다. 불을 잘 켜지 않는데도 김 씨가 한 달에 내는 전기료는 4만원 안팎이나 된다. 김 씨가 살고 있는 셋방 건물이 상업용으로 분류돼 비싼 전기료를 내고 있기 때문이다. 김 씨는 "전기료도 비싸고 돈도 없어 덥고 어두워도 그냥 참고 지낸다"고 했다.
◆한순간에 무너진 삶
1970년대에 대학을 졸업한 김 씨는 나름 잘나가는 과외교사였다. 결혼 후에도 고교 교사였던 남편과 함께 맞벌이를 하며 크게 부족함 없이 생활을 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 과외금지 조치로 김 씨는 한순간에 일자리를 잃게 됐고,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화장품 가게도 했고, 다방도 해 봤는데 다 망했죠. 그때부터 빚이 늘기 시작했어요. 차마 남편에게는 '사업이 어렵다'는 말을 못하고 남편 몰래 이곳저곳에서 돈을 빌려 사업을 했지만 결국에는 다 망했어요."
사업은 실패했고 은행과 사채를 포함해 여기저기서 끌어다 쓴 빚이 1억원 안팎으로 불어났다. 채권자들이 김 씨의 집으로 찾아와 가족들까지 괴롭혔고, 과외금지 조치 해제 후 김 씨는 채권자들을 피해 경남 창녕군으로 내려가 과외교습으로 돈을 벌어 빚을 갚으려 했지만 채권자들은 창녕까지 찾아왔다.
결국 그곳에서도 소문이 나쁘게 나면서 더는 과외교습을 할 수 없게 됐고, 다시 대구로 돌아왔지만 이번엔 가족들이 김 씨 곁을 떠나갔다. 채권자들의 빚 독촉에 견디지 못한 남편이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혼자가 된 김 씨는 당장 돈이 필요했다. 이때 김 씨에게 "당신 명의만 빌려주면 돈을 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김 씨는 나쁜 일에 사용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한 푼도 없던 상황에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김 씨의 명의는 속칭 '대포차'를 만들 때 이용됐고, 김 씨는 그때 받은 돈보다 훨씬 많은 손해를 보게 됐다. 그러나 다행히 김 씨의 명의를 빌려간 대포차 업자가 경찰에 붙잡히면서 피해에 대한 보상을 어느 정도 받을 수 있었는데, 보상 명목으로 받은 것이 낡은 소형 중고차였다.
◆재기의 발목을 잡은 허리
김 씨는 이때 받은 중고차로 전단 배달일을 시작했다. 인쇄소에 가서 전단을 실어 전단을 배부하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일이었다. 김 씨는 중고차로 대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단을 배달했다. 하지만 김 씨의 몸은 이 일 때문에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5년쯤 지난 무렵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고, 병원에서 속칭 '디스크' 진단을 받았다.
"매일 무거운 전단 꾸러미를 옮기다 보니 허리에 무리가 간 거죠. 진단을 받았지만 바로 치료하지 못했어요. 하루 벌어 하루 사는데, 일을 쉬면 먹고살 수 없잖아요. 그렇게 계속 방치했더니 결국 허리를 펴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던 3년 전 어느 날, 김 씨는 허리가 아파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느꼈다. 구급차를 불러 대구의 한 종합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고, 수술밖에 방법이 없을 정도라는 진단을 받았다.
"수술을 받아야 한다니 막막했죠. 진찰할 때 선불로 내야 하는 MRI 촬영 비용이 없어 지인들에게 급하게 연락해 돈을 빌려 낸 마당에 수술비가 어디 있었겠어요. 그러던 중 다행히 병원 사회복지팀이 어느 복지단체를 통해 수술비를 해결해 줘서 수술을 받긴 했어요."
김 씨는 이때 8시간이 넘는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았다. 하지만 김 씨의 허리는 완치되지 못했다. 척추가 수술로도 회복이 힘들 정도로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할 수 있었던 건 탈출한 디스크의 위치를 조정해 신경이 눌리지 않도록 하는 것뿐이었다.
◆"허리를 펼 수만 있다면…"
김 씨의 허리는 수술 후 90도로 굽어진 채 펴지지 않는다. 이 때문에 짧은 거리를 걸어도 아주 고통스럽다. 용변을 해결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집 밖의 재래식 화장실을 이용해야 하는 김 씨는 아픈 허리 때문에 방 안에 요강을 두고 용변을 본 뒤 화장실에 가져가 버린다.
최근엔 병원으로부터 "수술 부위에 박아 놓은 핀이 부러져 다시 수술해야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러나 김 씨에겐 다시 수술받을 돈이 없어 한숨만 쉬고 있다.
김 씨는 허리 수술을 받은 뒤부터 일을 전혀 못하고 있다.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정부보조금 40만원이다. 이마저도 한 달에 11만원인 월세와 전기료, 각종 공과금 등을 내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게다가 생활비가 없어 속칭 '대포폰' 업자에게 명의를 팔고 돈을 받은 것이 부메랑이 돼 날아오는 요금을 김 씨가 내고 있다.
김 씨는 아픈 허리도 문제지만 살 곳이 사라지는 게 더욱 두렵다.
"집주인이 자꾸 방을 빼 달라고 해요. 하지만 당장 집을 구할 돈이 한 푼도 없는데 어디서 집을 구합니까. 혹시 수술을 받게 되더라도 집주인이 그 기간에 방을 빼 버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잠을 설치곤 합니다."
김 씨는 어쩌다가 찾아오는 이 하나 없고, 갈 데도 없는 인생이 돼 버렸는지 생각할수록 답답하다. 재기해서 남은 인생을 보람있게 살고 싶지만 구부러져 더 이상 펴지지 않는 자신의 허리처럼 인생도 그렇게 돼 버린 것 같아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다.
"만약 허리만 펴진다면 30, 40대보다 더 의욕적으로 뛰어다닐 자신이 있어요. 하지만 제 현실은 어두운 방에 들어앉은 채 구부러진 허리도 펴지 못하는 늙은이 신세네요. 다시 허리를 펼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이화섭기자 lhsskf@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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