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2)독립운동의 가시밭길로

"광복운동에 유림이 빠지다니…이 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

기미년(1919년) 2월 심산은 성태영이 서울서 보낸 편지를 받았다. "광무 황제의 인산을 삼월 초이틀에 거행하는데 그때 국내 인사들이 모종의 일을 일으키려 한다. 자네도 바로 상경하여 시기를 놓치고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경북 금릉군 지례 사람 성태영은 구한말 양심적인 지주로 젊은 인재를 보살피며 애국사업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조선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참여하라는 권유였다.

그러나 모친의 병환으로 심산은 그믐이 다 돼서야 서울로 갔다. 바로 다음 날이 3월 1일이었다. 서명은 물론 참여할 기회를 놓치고 만 것이다. 육당 최남선이 쓰고 태화관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에는 민족대표 손병희 등 33인이 서명했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 대표들이었다. 유림의 이름은 아무도 없었다. 심산은 통탄한 심정을 자서전에서 이렇게 기술했다. "우리나라는 유교의 나라였다. 나라가 망한 원인은 유교가 먼저 망했기 때문이다. 지금 광복운동을 선도하는 데 3교의 대표가 주동하고 소위 유교는 한 사람도 참여하지 않았으니 세상에서 유교를 꾸짖어 오활한 선비, 썩은 선비와는 더불어 일할 수 없다 할 것이다. 우리들이 이 나쁜 이름을 뒤집어썼으니 이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겠는가."

심산은 유학을 배우고 익힌 사람으로서 민족의 독립투쟁을 외면한다면 유교의 죄인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유학자로서 할 일을 찾아야 했다. 심산은 전국의 유림을 단결시켜 일을 도모코자 했다. 그는 뜻을 같이하는 벗에게 제안을 했다. "손병희 등이 선언문을 발표해 국민을 고취시켰지만, 국제적인 운동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파리평화회의에 유림의 대표를 파견, 국제여론을 확대시켜 독립을 인정받도록 하자."

전국의 유림을 움직이려면 우선 명망 높은 유림의 어른이 나서야 했다. 또 일을 극비리에 추진하자면 평소 친하게 지내던 사람과 시작해야 했다. 영남 선비 심산은 당장 서울에 와 있던 영남 유림의 어른 이중업을 찾았다. 이중업은 강개한 어조로 승낙했다. 거사의 뜻을 같이한 영남 유림의 벗들을 각지로 보냈다. 심산도 영주 안동과 왜관의 선'후배 벗들과 친지들을 만난 뒤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 거사의 자초지종을 말했다. 늙고 병든 어머니를 두고 해외로 나가야 한다는 말도 비쳤다. 어머니는 흔연히 말했다. '너의 이번 거사와 걸음은 평소에 소원하던 바이니 늙은 어미에 마음 쓰지 마라.'

◆어머니와의 마지막

집을 나서려니 발걸음이 무거웠다.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할 수 없었다. 어머니를 살아생전 다시 볼 수는 있을까. 열 걸음에 아홉 번을 돌아보았다. 문간에 나와 배웅하던 어머니는 슬픈 기색을 감추고 말했다. "네가 아직도 가사를 잊지 못하느냐. 네가 국민과 약속을 했으니 맡은 짐이 무겁다. 빨리 가서 대사를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해라." 심산이 살아생전 바라본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었다.

거창의 거유 면우 곽종석은 "전국 유림을 이끌고 천하만국에 대의를 소리치게 되니 나도 죽을 자리를 얻었다"며 힘을 보탰다. 장석영이 초안을 잡은 호소문을 수정해 준 면우는 출국 길의 심산에게 여러 조언을 했다. 해외 사정에 생소한 만큼 안창호 이승만 이상룡 같은 해외 선구자들과 먼저 상의하라고 했다. 중국 혁명당 요인들의 손을 잡아야 지원을 얻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중국 국민당 인사인 운남 사람 이문치를 소개해 주었다.

심산의 출국길은 처음부터 가시밭길이었다. 유림이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다는 낌새를 챈 왜경들이 뒤쫓아 오기 시작했다. 친척이 경영하는 주막에서는 아예 쫓겨났다. 그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천신만고 끝에 서울에 당도하니 각지로 떠났던 동지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길에서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한 이도 있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평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일 자체를 반대하는 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의 대의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는 법, 마침 충청도 지역 유림들도 대표를 파리평화회의에 보내고자 일을 꾸미고 있었다. 영남과 충청 및 서울의 유림 대표들은 심산이 가져온 호소문에 전국 유림대표들의 서명을 받아 파리에 보내기로 합의했다. 여비와 외교문서는 직접 휴대하기 불편한 만큼 중국 상인의 도움을 받아 먼저 봉천으로 보냈다. 그리곤 3월 23일 밤 심산은 서울을 떠났다. 봉천에 도착하자 먼저 상투를 잘랐다. 국가의 독립을 위해 몸을 바친 마당에 머리털을 아까워할 일이 아니었다. 서울을 떠나기 전 여러 동지들이 단발을 권유했지만 해외로 나가기 전에 머리를 깎으면 의심을 받을 수가 있다며 미룬 일이었다.

◆ 파리행을 그만두고

며칠 후 심산은 상해에 도착했다. 이동녕, 이시영, 신채호, 조완구, 신규식 등을 만나 파리에 가려는 뜻을 전했다. 그러나 이미 상해에서는 민족대표로 김규식을 파리에 보낸 뒤였다. 상해에 먼저 와 있던 이들은 심산에게 파리행을 그만두라고 권했다. 서양말도 모르는 데다 동행할 이도 마땅찮은 그를 길잡이조차 없는 장님이라고 비유했다. 대신 중국 내에서의 활동을 권했다.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중국으로 삼은 만큼 중국인과의 교제가 매우 중요한데 한학에 정통한 사람이 아니면 이들을 움직이기가 쉽지 않다며 심산에게 대중국 외교에 나서달라고 권했다. 심산도 그들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가져 온 유림의 호소문을 번역, 파리 평화회의에 우편으로 보내는 한편 중국 정계와 각국 대사관 및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는 중국 여러 도시에 배포했다.

심산이 도착했을 당시 상해에는 안창호 김구 박은식 등도 속속 들어왔다. 먼저 와 있던 인사들과 함께 논의한 그들의 현안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정부를 세우려면 먼저 의정원을 구성해야 했다. 상해 한인거류민회를 열어 각도의 의원을 뽑았다. 심산은 경북의 대표의원으로 뽑혔다. 심산이 파리행을 그만두고 중국에서의 활동을 결심했을 때 국내에서는 유림에 대한 일대 검거 선풍이 불고 있었다. 곽종석을 비롯해 무려 500여 명의 유림 인사들이 체포됐다. 일의 시작 과정에서 여러 동지들에게 밀서를 부친 일이 있었는데 그게 들통난 것이었다. 이른바 1차 유림단 사건이었다. 일을 주동하고서도 조국을 벗어나 혼자 화를 면한 심산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이제 조국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땅이 됐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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