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인터뷰通] 한국여성장애인연합 권순기 상임대표

고교 때 모은 수면제 결혼 후 버렸지만…거듭된 시련에서 배운 '함께하는

권순기 대표는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동신초교, 경명여중, 경북여고와 대구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대구가톨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사회복지학)를 받았으며 올해 2월 계명대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구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장을 거쳐 대구여성장애인연대 대표
권순기 대표는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동신초교, 경명여중, 경북여고와 대구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대구가톨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사회복지학)를 받았으며 올해 2월 계명대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구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장을 거쳐 대구여성장애인연대 대표'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권 대표는 "10여 년 전 처음으로 여성 장애인들끼리 모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추억이 생생하다"며 "스스로 노력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온 모든 여성 장애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권순기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는 소외되고 차별받는 여성 장애인들의 인권 보호와 사회 인식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김태형기자
권순기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는 소외되고 차별받는 여성 장애인들의 인권 보호와 사회 인식 변화에 앞장서고 있다. 김태형기자

그는 코흘리개들 사이에 늘 놀림감이 되곤 했다. 돌이 채 되기도 전에 찾아온 소아마비 때문이었다. 자신의 앞에서 불편한 걸음걸이를 흉내 내는 모습을 볼 때면 죽고 싶은 마음만 가득했다.

자존감은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갖기 힘들었다. 또래보다 작은 키와 평범한 학업성적은 스스로 '잉여 인간'이라 생각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처럼 쓸모없는 인간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다'고 매일 되뇌면서 수면제를 모으기 시작했다. 하지만 끝내 실행에 옮길 수는 없었다. 자신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생해 온 엄마가 너무 불쌍할 것 같았다. 제대로 돛도 펴보지 못하고 난파할 뻔했던 권순기(51) 사단법인 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의 인생 항로가 180도 달라지던 순간이었다.

◆여성장애인 인권 보호에 앞장

지체장애 2급인 권 대표의 '아픈' 이야기에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어머니와 장애인들의 애환이 응축돼 있는 듯 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담담하게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나가는 모습은 그가 왜 '긍정의 전도사'라는 이야기를 듣는지를 보여줬다.

"이 일을 하면서부터 좋은 생각을 하면 기가 모이는 것 같다는 느낌을 자주 받아요. 그래서 어렵고 힘든 상황이 닥쳐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저희 직원들은 가끔씩 제게 좋은 기운을 불어넣어 달라고 부탁도 하곤 하지요. 얼마 전 발등뼈가 부러져 걷지도 못하게 됐지만 그냥 잠시 쉬어갈 타이밍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어요."

말과 달리 그의 일상은 여전히 바쁘다. 보행보조기를 이용하는 평소와 달리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는 요즘도 일주일에 두 세 번은 서울행 KTX를 탄다. 여성장애인들의 인권 보호를 위해 앞장서고 있는 단체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만큼 잠시도 쉴 틈이 없다.

"몸이 피곤한 것은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다친 뒤에야 중증장애인들이 겪는 고통을 피부로 느끼게 됐다고나 할까요? 혼자 힘으로 대구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대중교통으로 이동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일반인들은 잘 모르실 겁니다. 동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두말할 나위가 없고요."

그는 한국여성장애인연합 대구지부인 대구여성장애인연대(대구 달서구 대곡동) 대표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여성장애인보호작업장, 대구여성장애인통합상담소, 여성장애인어울림센터 등이 함께 운영되고 있다. 일거리가 늘 쌓여 있다.

"여성 지적'지체장애인 10명이 일하는 작업장에서는 장갑, 천연비누를 만듭니다. 하지만 판로가 아직 확보되지 않아 걱정이에요. 상담소에는 성폭력'가정폭력 상담이 연간 600건 정도 들어옵니다. 대구는 보수적인 곳이라 가정폭력보다는 성폭력 상담 비율이 조금 더 높고요. 2010년 문을 연 어울림센터는 여성장애인 생애주기별 맞춤형 상담과 기초역량강화 교육 등을 하고 있습니다. 장애'여성'빈곤의 삼중고를 겪고 있는 여성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한 원스톱 서비스가 목표인데 많은 분들의 도움과 관심이 필요합니다."

◆장애'여성'빈곤의 삼중 차별과 맞서다

권 대표가 여성장애인을 위해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한 것은 1999년. 그보다 앞서 장애인 지인 10여 명으로 시작했던 소모임 활동이 한국여성단체인연합의 설립과 함께 대구지부로 조직화되면서다. 한국여성단체인연합이 전국 10개 지부에 회원 5천여 명이 활동하는 큰 조직으로 성장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그는 원래 지적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의 교사였다. 대구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상주에 있는 상희학교에서 3년간 근무했다. 어쩌면 평생 평온한 교단에 머물렀을지도 모를 그를 여성장애인운동이라는 황무지로 이끈 것은 '모성애'였다.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쏟아부었던 것처럼.

"1988년 결혼한 뒤에 잇따라 유산하는 아픔을 겪었어요. 딸 아이 하나는 100일도 안 돼 가슴에 묻어야 했고요. 학교를 그만두고 1994년 아들을 간신히 얻고 난 뒤 사회활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아이들을 잇따라 잃다 보니 생명의 존귀함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지요. 가정폭력과 성폭력 위험에 노출돼 있는 여성 장애인들을 위한 상담을 하기 시작했는데 저보다 훨씬 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는 여성들이 너무 많아서 가슴 아팠습니다."

이후 그는 여성 장애인들을 위한 삶을 살아왔다. 가족상담사, 요양보호사, 복지상담사, 상담심리사, 문제해결상담사 등의 자격증을 땄다. 국무총리실 장애인정책조정위원회 위원, 서울시 성평등위원회 위원, 대구시 장애인복지위원회 위원, 영남권역아동성폭력전담센터 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2011년 장애인의 날을 맞아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올해의 장애인상'을 받았다.

"가끔 남편이 그때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어야 했다고 농담해요. 지금쯤이면 연봉도 꽤 많고 일도 훨씬 편했을 텐데 괜히 사서 고생하고 있다는 얘기죠. 하지만 제 자신이 장애인인 만큼 당연히 할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어렸을 적 고민해야만 했던 것들, 누리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여성 장애인들은 겪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저는 고등학교 때 나쁜 생각에 모았던 수면제 서른 알을 결혼 뒤에야 겨우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었습니다."

권 대표의 활발한 봉사활동 뒤에는 대학교 때 동아리에서 만난 남편 곽효섭 씨의 든든한 외조가 있었다. 역시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2급인 곽 씨는 대구여성장애인연대를 위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선뜻 내놓았고 빚을 내 건물까지 지어줬다. 서로를 존중해주자는 마음에서 서로 높임말을 쓰는 권 대표 부부는 2004년 대구시로부터 목련상 '평등가정' 부문 수상자로 뽑히기도 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권순기 대표는

1962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2급 판정을 받았다. 동신초교, 경명여중, 경북여고와 대구대 특수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특수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대구가톨릭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사회복지학)를 받았으며 올해 2월 계명대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대구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소장을 거쳐 대구여성장애인연대 대표'한국여성장애인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다. 권 대표는 "10여 년 전 처음으로 여성 장애인들끼리 모여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추억이 생생하다"며 "스스로 노력으로 세상을 조금씩 바꿔온 모든 여성 장애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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