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칼 마르크스, 기자로서도 탁월했다?

1850년대 런던 특파원 활약…역사·국제 정세 명쾌한 식견

런던특파원 칼 마르크스/ 정명진 옮김/ 칼 마르크스 지음/ 부글 펴냄

칼 마르크스, 여러 가지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역사적 인물이지만 이 책은 마르크스를 저널리스트로 조명한다. 저널리스트로서도 마르크스는 탁월했다고 한다. 당시 세계의 중심인 런던에서 격동의 1850년대를 해부하는 데 역량을 발휘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경제학자, 철학자, 정치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왔고 또 평가받아왔다. 하지만, 그전에 저널리스트로 활동한 이력은 조명받지도 평가받지도 못했다.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서 활동하던 1850년대,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60년 전의 일이다. 마르크스가 저널리스트로 처음 기사를 써 게재된 것은 1842년 5월의 일로 독일 쾰른의 한 신문이었다. 지방의회가 언론의 자유를 놓고 벌이는 논쟁에 관한 글이었으며, 그는 이 글로 저널리스트의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권력 앞에서도 할 말은 하는 용기와 의지가 저널리스트로서 가장 중요한 자질이라면 그는 충분한 자질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1848년에 쾰른에서 급진적인 신문 '노이에 라이니쉐 차이퉁'을 창간했다. 그러나 그의 기사를 가장 많이 실은 곳은 바로 미국의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었다. 기명 기사만 350건이나 된다.

마르크스와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인연은 그 유명한 '공산당선언'이 발표된 1848년 시작되었다. 전 유럽에 혁명이 휘몰아친 해였다. '뉴욕 데일리 트리뷴'의 편집자이던 찰스 A. 다나는 1848년 8개월 동안 유럽을 여행 중이었다. 당시 29세였던 다나는 독일에서 당시 30세이던 마르크스를 만났다. 3년 뒤인 1851년에 다나가 마르크스에게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1848년 이후 유럽의 변화에 관한 글을 시리즈로 써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당시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독자를 20만 명 이상 거느린 세계 최대의 신문이었다는 점과 고정 수입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이 동료 엥겔스에게 생계의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던 칼 마르크스의 구미를 당겼던 것으로 보인다. 마르크스의 뉴욕 데일리 트리뷴 특파원 신분은 1862년 3월까지 이어진다.

마르크스의 기사들을 보면 역사적 분석 면에서 아주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국내나 국제 정치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사회적, 경제적 배경에 초점을 맞추고, 정치인과 정부의 발언이나 조치 뒤에 깔린 진짜 동기를 찾으려 애를 쓰는 흔적이 역력하다. 사건을 단순히 전달하는 역할에서 그치는 글이 하나도 없다.

미국의 남북전쟁을 보자. 그의 기사는 노예해방은 그 전쟁의 결과였을 뿐 그 목적은 연방의 존속인 것으로 확인된다. 당시 최고 강대국으로 영국은 노예제도의 확대를 외치던 남부에 우호적이었다. 영국의 진짜 목표는 미국 연방의 해체였다는 것이다.

한편 옮긴이의 말 말미에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1961년 미국 신문발행인들 앞에서 했다는 농담이 실려 있다.

"1851년에 '뉴욕 데일리 트리뷴'이 칼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보잘것없는 저널리스트를 런던 특파원으로 고용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회당 5달러라는 괜찮은 원고료를 받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올려달라고 졸랐다는군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 친구는 다른 생계수단을 찾아 나섰고, 결국엔 '트리뷴'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이 세상에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혁명과 냉전의 씨앗을 뿌리게 될 그 사상에 풀타임으로 자신의 재능을 바치게 되었지요. 만일 뉴욕의 그 자본주의 신문이 그에게 원고료를 조금 더 올려주고 계속 특파원으로 활동하게 했더라면 아마 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지요."

356쪽. 1만8천원.

이동관기자 dkdk@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