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김애란의 청춘발언대] 설국열차, 어떻게 보셨나요?

요즘도 한창 인기리에 상영 중인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영화만큼이나, 찬사와 실망으로 양분된 평가로 화제였습니다. 마치 '설국열차'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서 전 국민의 생각을 실험하는 듯했습니다. 그 양분된 평가의 주된 이유에는 아마 영화의 '결말'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겁니다. 꼬리 칸의 커티스가, 엔진 칸의 윌포드를 죽이면 어찌 되느냐는 궁금증은 마지막 부분에서 전혀 새로운 국면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엔진 칸에 다다른 커티스는 윌포드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습니다. "네가 생각했을 때 내가 이 열차의 주인 같겠지만, 우리 모두가 열차에 속한 상황은 똑같다"라고 말입니다. 커티스는 그 말을 통해 자기가 꿈꿨던 모든 시도가, 결국엔 모두 이 열차의 구조 속에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더 자유롭고 인간적인 세상, 즉 '유토피아'를 원했던 커티스의 이상은 그를 도왔던 길리엄과 윌포드의 은밀한 내조, 열차가 유지되었던 그 체제를 인식함으로써 깨어지죠. 영화 내내 커티스는 열차의 질서를 바꿀 '예외'적인 사람으로 비쳐졌지만,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주인공과 관객 모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꼬리 칸뿐 아니라 열차에 탔던 모든 사람들처럼, 커티스 역시도 세계의 질서를 따르는 '규범'적인 인물이었단 사실을 말입니다.

혁명이 성공할 것 같았던 분위기는 이렇게 역전됩니다. 그러나 이 분위기는 완전하지 못했고, 또 그리 오래가지 못하죠. 암울한 현실을 이야기할 것 같았던 영화는 남궁민수와 요나라는 인물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커티스는 열차란 세계의 진실에 이르렀으나, 남궁민수와 요나는 열차의 세계를 넘어선 새로운 곳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커티스를 통해 그려졌던 열차 속 역사적인 과정이, 결말에 와 모두 사라져 버리죠. 영화의 구조가 획득한 진실은 사라지고, 전혀 다른 주제의식이 시사되는 것입니다. "진짜 해답은 열차 바깥에 있다."

체제 내의 싸움은 불완전하고, 결국 체제 바깥을 상상해야 한다는 논리적 구조는 꽤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이 결론은, 도식적인 '설국열차'란 이야기 프레임에서나 가능할지 모릅니다. 영화처럼 열차의 안과 밖의 구분은, 사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겠죠. '설국열차'의 세계상은 오히려 지금보다는 1900년대 초 딱딱했던 근대, 아니 어쩌면 그 이전인 1840년대 혁명의 시대와 닮았습니다. 계급적인 구분이 확연하지만, 인도적인 의식이 깨어났던 그 시절의 우화 같죠. 지금의 세계는 점점 온라인과 오프라인, 국경과 국경, 자아와 타자라는 안과 밖의 구분과 경계가 사라지는 곳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딱딱하고 구분된 근대는 점점 사라지고, 유동적이고 이동성이 강한 지금의 시기를, '액체 근대'라고 표현했죠.

영화를 본 뒤, 낭만적인 사람은 확신과 희열을 느꼈을 테고, 세속적인 사람은 똑같은 곳에서 허무와 실망을 느꼈을 것입니다. 결말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공감한 사람들은 아마 다른 이들에게 "너머를 상상하자!"고 외쳤을지 모르죠. 하지만, 도대체 왜 이런 결말을 내린 건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지금의 현실에 더 가까운 진실일지 모릅니다.

결말에 대한 비평을 떠나 '설국열차'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얻어진 사회적인 의미의 시사점이 있습니다. 평가가 양분될 정도로, 생각보다 이 영화에 대한 실망의 반응이 많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그리고 젊은이들 역시 이 영화의 결말을 부정적으로 느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런 반응은 체제를 벗어난,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과 희망을 '비현실적'으로 인식하는, 더 나아가서는 아예 이 우화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고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영화의 실험은 슬프게도 '현실을 넘어서는 상상이 존재하지 않는 경직된 사고'가, 우리 안에 많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지요.

대구경북 대학생문화잡지 '모디' 편집장 smile5_3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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