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생은 과일처럼 익는다-이기철(1943~)

창문은 누가 두드리는가, 과일 익는 저녁이여

향기는 둥치 안에 숨었다가 조금씩 우리의 코에 스민다

맨발로 밟으면 풀잎은 음악 소리를 낸다

사람 아니면 누구에게 그립다는 말을 전할까

불빛으로 남은 이름이 내 생의 핏줄이다

하루를 태우고 남은 빛이 별이 될 때

어둡지 않으려고 마음과 집들은 함께 모여 있다

어느 별에 살다가 내게로 온 생이여

내 생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구나

나무가 팔을 벋어 다른 나무를 껴안는다

사람은 마음을 벋어 타인을 껴안는다

어느 가슴이 그립다는 말을 발명했을까

공중에도 푸른 하루가 살듯이

내 시에는 사람의 이름이 살고 있다

붉은 옷 한 벌 해지면 떠나갈 꽃들처럼

그렇게는 내게 온 생을 떠나보낼 수 없다

귀빈이여, 생이라는 새 이파리여

네가 있어 삶은 과일처럼 익는다

-월간《현대문학》(2013년 9월호)

척 봐도 이기철 시인의 시다. 그리움의 시인. 일흔 고개에서도 지치지 않고 그리움을 변주해내는 솜씨가 무결하며 고결하다. 숱한 그리움에 날밤 새워도 여전히 풀지 못한 그리움이 있는 까닭이다. 사람 아닌 다른 그리움에 가닿는 마음의 코빼기는 고사하고, 그리움이란 언어를 최초로 발명한 가슴의 뒤꿈치도 못 보았다고 고백하고 있다. 외롭다는 증거다.

그런데 이 시는 좀 다르다. 인생의 저녁이 오고 꽃이 지는 시간이 되어도 도무지 어두워지지 않고 도대체 질 줄 모르던 그리움의 끈을 얼마간 풀고 있다. 꽃이 지고 어둠은 짙어졌지만 불빛으로, 별빛으로 살가운 "내 생의 핏줄"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단란한 풍경이다. "생이라는 새 이파리가" 함께하는 밤에서야 그리움을 내려놓고 비로소 익어간다는 깨달음이다. 무르익으면 지는 법. 한 몸 같던 그리움도 지지 않으면 지울 수도 있다는 말이겠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기다렸다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운 것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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