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을사조약 통곡 술로 허송, 고향 돌아와 부모에 죄 빌고 두문불출 공부 삼매경

1910년 한일합병조약이 일본의 강제로 불법 체결되면서 5년 전 을사조약 이후 실질적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에 고스란히 편입됐다. 나라가 망한 것이다. 합병조약은 한국 황제는 한국 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본 황제폐하께 양여함이라고 규정했다. 나라가 망하자 심산은 '선비로서 살아 있다는 것이 큰 수치다'며 통곡했다. 날마다 폭음을 이어갔다. 취할 때까지 마시고 취하면 소리내어 울었다. 말리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욕설을 퍼부었고 그를 피해 도망가는 사람을 쫓아가서 때리기도 했다. 갓을 버리고 대신 삿갓을 쓰고 다녔다. 식민지 조선의 환심을 사고자 일본이 뿌린 은사금을 받은 양반들을 만나면 침을 뱉고 욕을 했다. 그러다 아예 양반들을 멀리하고 술과 노름을 일삼는 하인배들과 어울려 다녔다.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했다.

미치광이가 됐다는 소문을 안은 채 술과 노름으로 방황하며 떠돌던 심산은 몇 달 만에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뜰 아래 엎드려 어머니께 죄를 빌었다. 어머니는 통곡했다. 일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학문을 닦으면서 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너의 나아갈 길이다. 네가 과오를 바로잡는데 힘을 기울인다면 옳은 사람이 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심산은 머리를 숙이고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일가 사람들을 둘러보며 어머니는 "어른들께서 잘 가르쳐 올바른 사람이 되게 한다면 우리 김씨 문중의 다행이 아니겠느냐"고 했다.

죄인을 자처한 심산은 문을 닫아 걸고 학문의 삼매경에 빠졌다. 그의 집에는 전해 오는 장서가 많았다. 먼저 경서를 읽고 심오한 진리를 이해한 다음 제자백가를 고찰했다. 의심이 있으면 사색하고 터득하면 바로 적어 두었다. 5년여를 두문불출하고 책을 읽고 사색에 빠졌다. 세상사는 전혀 묻지 않았다. 이때 비로소 '사람의 욕심을 막고 자연의 도리를 지키는 것이 학문을 하는 진수'라는 점을 알게 됐다. 후일 한국 유림의 대표로 꼽힌 심산은 자서전에서 "나의 일평생에 학문의 득력은 실로 이때 이루어진 것"이라고 회고했다. 독립운동은 물론 사회 정치활동의 학문적 기초가 이때 마련된 것이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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