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가봉'의 추억, 몸에 착 붙던 그 느낌 아니까…

기성복에 밀려난 '맞춤 양복' 지금은…

개성과 품질에다 가격경쟁력까지 갖추면서 맞춤 양복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이달 초 열린 제1회 맞춤 양복 소상공인 기능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임재현 씨.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개성과 품질에다 가격경쟁력까지 갖추면서 맞춤 양복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이달 초 열린 제1회 맞춤 양복 소상공인 기능경진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임재현 씨.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이달 초 서울에서 열린 제35차 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에서는 초고가 양복이 공개돼 화제를 모았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맞춤형 양복 소재로 자주 쓰이는 것으로 알려진 제일모직의 '230수 란스미어'(lancemere) 원단으로 만든 제품이다. 양복 제작에 소요된 원단 가격만 1천500만원, 판매가는 3천만원을 호가한다. 이 같은 '꿈의 양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장인(匠人)들이 한땀 한땀 기워서 만든 맞춤 정장은 멋쟁이라면 누구나 한 벌쯤 갖고 있는 아이템이다. 최근에는 맞춤 양복은 비싸다는 선입견을 깨고, 기성복보다 싼 가격으로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양복점들도 등장하고 있다. 올가을에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옷'을 마련해보는 건 어떨까? 그 느낌 아니까!

◆꼼꼼한 바느질에 편안함까지

이번 세계주문양복연맹총회 기간 중에는 ㈔한국맞춤양복협회가 제1회 맞춤양복 소상공인 기능경진대회를 열어 눈길을 끌었다. '한국 테일러'들의 기예를 세계 23개국 600여 명의 맞춤양복 전문가들에게 선보이려고 마련한 것이다. 60여 명의 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주문양복 사업자등록증 소지자로서 평균 경력 35년 이상의 베테랑들이었다.

대구 '해성라사'의 임재현(64·대구 중구 대신동) 씨는 여기에서 최우수상(2위)을 받았다. 지방에서 양복점을 운영하는 유일한 수상자였다. '선수'들은 첫날 한 사람씩 밀실에 들어가 같은 모델을 두고 채촌(몸치수를 재는 일)을 한 뒤 이튿날 똑같은 천을 받아 양복 재킷을 만들었다. 박음질은 미싱 대신 직접 손으로 해야 했다.

경력 41년의 임 씨는 "다른 참가자들은 연습을 많이 한 듯했는데 다행히 타고난 눈썰미가 좋아서 큰 상을 받은 것 같다"며 "눈대중만으로도 고객의 치수를 짐작할 정도의 실력은 된다"고 겸손해했다. 또 "기성복은 사람의 양팔 길이가 다르다는 사실조차 반영하지 못한다"며 "사람이 입은 옷은 마네킹에 걸쳐놓은 옷과 확실하게 차이가 드러난다"고 말했다.

키 176㎝에 체중 80㎏이 넘는 엄복태(47·광고기획사 대표) 씨는 이 같은 맞춤 양복의 장점에 반해 5년 전부터는 기성복을 사지않는다. 허리 치수가 맞으면 길이가 맞지 않는 식으로 불편했기 때문이다. 엄 씨는 "직업 특성상 매일 양복을 입어야 하지만 평균 체형을 기준으로 만든 기성복은 남의 옷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들어 30대 중반부터 맞춰 입기 시작했다"며 "계절마다 한 벌씩 새로 장만하는 정도"라고 소개했다.

엄 씨는 10여 년 동안 맞춰 입다 보니 자신만의 노하우도 생겼다고 귀띔했다. 대구 서문시장 원단 가게에서 마음에 드는 천을 직접 고른 뒤 단골 양복점에 제작을 주문하는 식이다. 엄 씨는 "정통 수제 양복점의 경우 가격이 높고, 시스템 오더 방식으로 제작하는 '맞춤형 기성복' 브랜드에는 마음에 드는 원단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국산 고급 원단을 쓰더라도 한 벌에60만원 정도의 비용밖에 들지 않아 백화점 제품의 절반 이하 가격에 마련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비싸다는 건 편견?

지난 3월 공직자윤리위원회가 공개한 '고위 공직자 정기 재산 변동사항'에서 전국 광역 시'도 의원 중 최고 자산가로 나타난 이재녕 대구시의원(문화복지위원장)은 패션 감각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가 입는 양복은 질 좋은 원단임에도 가격은 수십만 원 대에 불과하다. 이런 소문이 나면서 최근 대구시의회에서는 이 의원의 소개로 양복을 맞춰 입는 의원들이 늘고 있기도 하다. 수제 양복 마니아인 이 의원은 "맞춤 양복은 입는 재미가 특별해 가봉을 두 번씩 한다"며 "유명 브랜드보다 훨씬 착용감이 좋은데 굳이 거품 끼인 기성복을 고집할 필요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29일 찾아간 이 의원의 단골집은 대구 수성구 수성동에 있는 '로얄양복'이었다. 달구벌대로에 접해 있지만 간판이 작은 데다 매장 규모가 10㎡ 남짓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하지만 솜씨와 합리적 가격 덕분에 단골들이 상당하다. 보통 일주일 정도 걸려 만드는 양복 한벌은 30만~35만원 선이다.

45년 경력의 표영호(61) 대표는 "대기업의 기성복에 맞서려면 신뢰와 적절한 가격을 갖춰야 한다"며 "오랜 세월 동안 거래해온 업소에서 원단을 싸게 구입하고 혼자서 모든 작업을 하니까 가격경쟁력이 있다"고 털어놓았다. 표 대표는 이어 "기성복은 아직 제대로 수트를 입을 줄 모르는 젊은 층이나 찾는 것"이라며 "중장년층 고객들이 아들, 사위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흔하다"고 전했다.

대구 중구 남일동에 있는 '밀라노양복'도 단골이 많다. 유명 연예인, 스포츠스타, 정치인과 종교인들이 자주 찾는다. 특히 이곳은 유명 수입 원단을 골고루 갖추고 있어 한국을 찾은 외국 비즈니스맨이나 유학생, 신혼부부들에게 인기다. 김 대표는 "고객 가운데 70% 정도가 수입 원단을 원하는데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최고급으로 해달라는 고객들이 꽤 있다"며 "최상급을 쓸 경우 한 벌 가격이 180만원 정도이지만 백화점에 비하면 저렴한 편"이라고 말했다. 한국맞춤양복협회 대구지부장을 맡고 있기도 한 김 대표는 또 "젊은 고객들은 최신 트렌드 양복의 사진을 찍어와서 주문하기도 한다"며 "불경기에는 검은색이 대부분인데 올가을에는 회색과 갈색이 유행할 전망이라 기대가 된다"고 웃었다.

◆기성복에 시장 뺏겼지만 부활 조짐도

한국의 맞춤 양복 기술은 세계적 수준이다. 우리나라가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딴 첫 금메달도 제16회 스페인대회 양복 직종에서 나왔다. 한국이 이후 12연패를 달성하자 다른 나라들이 줄줄이 불참을 선언, 나중에는 대회 종목에서 제외될 정도였다. 국내 양복 장인들의 자부심이 탄탄한 이유다.

하지만 맞춤 양복은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꼽힌 지 오래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대기업들이 만든 기성복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면서 줄곧 쇠락의 길을 걸어왔다. 대구의 경우도 내로라하던 시내 중심가의 양복점들이 1990년대 이후 대부분 자취를 감췄다. 한국맞춤양복협회 대구지회에 따르면 회원이 50명을 훨씬 웃돈 때도 있었지만 요즘은 20여명 정도가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맞춤 양복점들의 형편이 더 나빠지지 않은 것도 '망할 가게는 벌써 다 망했기 때문'이라는 자조 섞인 우스갯소리가 등장할 만 하다.

맞춤 양복은 지난 2011년부터 전국기능경기대회 직종에서도 제외됐다. 1966년 첫 대회부터 전국의 마이스터들이 기술을 겨뤘지만 흐름의 변화는 어쩔 수 없었다. 시계 수리, 자수, 나전칠기, 기계 편물 등도 '양복'과 함께 빠졌다. 2009년 제44회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2위를 차지했던 김성영 대표는 "어떻게 하면 수제 양복이 살아남을까 하는 문제는 오랜 화두이지만 하루아침에 풀기는 힘들다"며 "전문 기술자가 사라져 가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자성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고정고객이 1천 명 정도 된다는 임재현 대표는 "대기업의 공세가 주요 원인이었지만 손님들의 불신도 맞춤 양복의 몰락을 불렀다"며 "지방자치단체, 정부 기관의 지원과 배려도 필요하지만 기술력과 신뢰를 함께 제공하려는 업계의 노력이 앞서야 한다"고 말했다.

물론 긍정적인 신호도 있다. 최근 고객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고객이었던 중장년층들은 물론 패션에 민감한 젊은 층이 몸에 더 잘 맞는 맞춤 양복에 눈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가격 거품이 빠진 것도 취업준비생, 예비 신혼부부의 발길을 끌고 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부친이 유명 양복점을 운영했던 계명대 산업디자인과 백순현(53) 교수는 "외국에서는 3D 스캐너를 맞춤 의류 제작에 활용하기 시작했는데 개별 양복점이 값비싼 스캐너를 갖추기는 힘들다"며 "지자체나 관련 기관이 소상공인들에게 대여해준다면 새로운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의류산업은 여전히 인류에게 중요한 산업이다.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인 의식주(衣食住) 가운데에서도 옷은 가장 앞자리에 놓여 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혼이 담긴 옷'을 입으려는 수요도 여전히 존재한다. '패션 도시'를 표방하는 대구에서 '양복점의 르네상스' 바람이 부는 날 '대구 신사'란 말도 유행하지 않을까.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