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은 감동이 있기 때문이다.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말하는 짜릿한 명승부가 그러하다. 하지만 자신과의 고독한 싸움을 이겨낸 선수들에게는 더 큰 박수가 쏟아진다.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케 했기 때문이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장애를 딛고, 사격 국가대표가 된 최수근(30'청각장애 2급) 선수 역시 인간 승리의 표상으로 꼽힐 만하다. 최 선수와의 인터뷰는 소속 팀인 IBK기업은행 사격부의 도움과 필담(筆談), SNS로 이뤄졌다.
◆농아인올림픽 첫 사격 3관왕
7월 26일부터 8월 4일까지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열린 제22회 농아인올림픽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3위의 성적을 거뒀다. 2009년 제21회 타이페이 대회와 순위는 같았지만 내용은 더욱 알찼다. 당시 한국은 금메달 14개, 은메달 13개, 동메달 7개를 따냈지만 이번에는 금메달 19개, 은메달 11개, 동메달 12개를 획득했다. 농아인올림픽대회(Deaflympics)는 1924년 시작됐으며, 소피아 대회에는 90개국 5천여 명의 선수단이 18개 종목에 출전했다. 한국은 1985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대회부터 참가했으며 올해 대회에는 11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한국 선수단이 이번에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둔 데에는 대구 출신인 최 선수의 활약이 컸다. 대회 첫날 남자 10m 공기소총에서 1위를 차지, 우리나라에 첫 금메달을 선물했다. 한국 선수단의 산뜻한 출발을 이끈 최 선수는 여세를 몰아 50m 소총 3자세와 50m 소총 복사까지 연달아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농아인올림픽 사상 최초의 사격 3관왕이다.
그의 주종목은 10m 공기소총. 이번 금메달은 농아인올림픽 10m 공기소총에서 개인 통산 세 번째다. 2001년 이탈리아 로마 농아인올림픽, 2005년 호주 멜버른 농아인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지만 타이페이 대회에서는 은메달에 머물렀다. 최 선수는 "대회 3연패에 실패했던 아쉬움을 이번 우승으로 조금은 달랠 수 있게 됐다"며 "이번 대회에 출전한 모든 종목에서 우승해 기분이 좋다"고 했다. IBK기업은행의 황의청(58) 감독은 "최 선수는 농아인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와 은메달 2개를 거머쥔 절대 강자"라며 "사격선수에게 꼭 필요한 집중력과 섬세함을 타고났다"고 평가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최 선수가 농아인대회뿐 아니라 비장애인 선수들과의 경쟁에서도 정상급 실력을 과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1년부터 국가대표 사격 선수로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합숙훈련 중인 그는 지난해 런던 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도 1위를 차지했으나 한국이 10m 공기소총의 출전권을 따지 못해 아쉽게 런던행이 좌절됐다. 최 선수는 "내년 인천 아시안게임과 2016년 브라질 올림픽에서 꼭 금메달을 따고 싶다"며 "9월 대구에서 열리는 경찰청장배 대회에서 우승해 고향 팬들의 성원에 보답하겠다"고 약속했다.
◆발군의 실력 뒤에는 가족의 무한사랑
최 선수는 생후 6개월 무렵 심한 열병을 앓고 나서 청각장애를 얻었다. 하지만 편견 없이 자라기를 원했던 부모의 뜻에 따라 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 대신 일반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는 어머니 허정분(61'대구 동구 지묘동) 씨가 함께 교실에 들어가 수업 내용을 대신 받아적은 뒤 집에 와서 다시 가르치는 일상이 반복됐다. 최 선수는 어머니의 정성 덕분에 상대의 입 모양을 보면 대화가 어느 정도 가능하다.
사격도 어머니의 권유로 인연을 맺었다. 지금이야 세계 최고의 명사수이지만 시작은 힘들었다. 허 씨는 최 선수가 입학한 대구 동원중학교에 사격부가 있는 것을 알고는 "일단 시켜만 달라"고 매달렸지만 쉽게 허락받지 못했다. 허 씨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운동을 시키고 싶었지만 당시만 해도 사격은 장애인에게 맞지 않는 스포츠라는 인식이 강했다"며 "열 번도 넘게 학교를 찾아가 선생님들을 설득한 끝에 겨우 사격부에 들어갈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후에도 허 씨의 헌신적 뒷바라지는 계속 이어졌다. 장애가 있는 아들에 대한 선생님들의 애정과 관심을 촉구하기 위해 학교 매점에 석 달 간 취업하기도 했다. 보청기를 끼고 다니는 모습을 놀리는 또래들의 장난에 아들이 힘들어하면 도리어 귀가 훤히 드러나도록 머리를 깎게 했다. 운동을 포기하고 싶어할 때마다 마음을 다잡도록 옆에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어려서부터 손재주와 집중력이 남달랐던 최 선수는 이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동원중 시절부터 각종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대구공고와 경남대에 스카우트됐다. 대구공고 시절에는 3년간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혔으며, 2005년 IBK기업은행에 입단한 뒤에는 세계 최상위권 실력을 유지하고 있다.
최 선수의 약점은 결선에서 다소 취약하다는 것이다. 소피아 농아올림픽 남자 50m 소총 3자세에서도 본선에서 크게 앞서 일찌감치 우승을 예약하는 듯했지만 결선에서 여러 차례 7, 8점대를 쏘면서 흔들렸다. 최근 국제사격연맹이 결선 성적으로만 우승을 가리는 방식으로 규칙을 변경한 것은 최 선수에게 다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어머니 허씨는 이와 관련해서도 "수근이가 결선에서 약한 징크스가 있어 상담을 받아봤더니 이름 탓일 수도 있다고 해서 개명을 고려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최 선수는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실력 있는 후배 키워내는 지도자가 꿈
청각장애가 있는 선수가 총성에 민감한 사격에서 일반선수들과 당당히 겨룬다는 것은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다. 농아인 대회의 경우 신호로 표시되지만 일반 대회의 경우 구령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잘 들리지 않는 최 선수는 옆 선수의 눈치를 보며 쏘곤 한다. 더군다나 최근에는 룰 개정으로 결선 사격의 제한시간이 앞당겨졌다. 격발에만 정신을 집중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9년째 최 선수를 지도하고 있는 IBK기업은행 황의청 감독은 "최 선수가 특수 보청기 사용과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어려움을 극복해내고 있다"며 "최 선수의 맹활약 이후 사격에 입문하는 장애인 선수가 늘고 있다"고 소개했다.
최 선수는 어눌하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유능한 지도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훈련하는 선수들을 잘 가르쳐 자신을 뛰어넘는 선수를 길러내고 싶다는 것이다. 최 선수는 이를 위해 최근에는 수화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전했다. 입 모양을 보며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농아인올림픽대회 같은 곳에서는 수화를 하지 못하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최 선수는 23일 소속 IBK기업은행으로부터 '자랑스런 기은인 상' 상금으로 받은 1천만원도 모교인 경남대에 기부했다. 황 감독은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만큼 최 선수가 기술 습득은 다소 늦지만 요령 피우지 않고 열심히 훈련한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체력 단련을 좀 더 열심히 해줬으면 하는 게 지도자로서 유일한 욕심"이라고 격려했다.
틈나는 대로 익힌 마술 실력을 사회복지시설 위문 공연을 갈 때마다 선보이기도 한다는 최 선수는 말수는 적었지만 명랑했다. 자신의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질 수도 있겠다는 질문에는 "평소 영화 보는 게 취미"라며 미소를 지었다. 가장 힘든 때가 언제였느냐는 물음에는 "사격이 재미있어서 힘들었던 기억은 없다"면서도 "포뮬러 원(F1) 선수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고 했다. 황 감독은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다가도 야단칠 때에는 못 알아듣는 척할 때가 있다"며 농담을 건넸다.
밝고 낙천적인 성격과 부단한 노력으로 장애를 극복한 최 선수는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중국 톈진에서 개최되는 제6회 동아시아경기대회에도 국가대표로 출전, 일반 국제대회 첫 금메달에 도전한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최수근 선수=1983년 대구에서 3남매의 막내이자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동문초교'동원중'대구공고를 거쳐 경남대를 졸업했다. 중학교 1학년 때 입문한 사격의 주종목은 10m 공기소총이다. 올해 열린 제22회 농아인올림픽대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사격 남자 3관왕(50m 소총 복사, 50m 소총 3자세, 10m 공기소총)의 영광을 안았다. 현재 사격 국가대표이며 2005년 체육훈장 거상장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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