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7월 5일.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에게 한 남성이 찾아왔다. 남성은 "자신의 남산동 종묘원 1만 평을 교구에 바치겠다"고 했다. 이 땅은 훗날 100년 천주교 역사를 담은 대구대교구청이 된다. 교구에 땅을 바친 남성은 독립운동가 서상돈이다. 대구대교구 100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상돈과 천주교의 인연은 고조부(서광수)의 천주교 입교로 시작됐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서상돈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대구로 와 보부상을 시작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건 김수환 추기경의 외조부 서용서 등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 덕분에 서상돈은 30대에 거상(巨商)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서상돈은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평신도 지도자로서 평생을 전교활동과 구휼사업에 힘썼다. 또한 대구가 남방 교구 중심지로 결정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서상돈은 한옥 성당이 불타자 새 성당을 짓기 위한 공사 자금을 마련하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8천냥을 빌렸다. 이 성당이 영남지최초로 서양식으로 지어진 계산성당이다. 이후 계산성당은 남방 교구를 대구에 설립하는 이유가 됐다.
대구교구가 설립되고 난 후에도 서상돈은 교구 발전을 위해 힘썼다. 드망즈 주교가 부임하고 난 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자 임시주교관을 마련했으며 후에는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터전을 만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건물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13년 세상을 떠났다.
정태우 천주교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은 "대구가 남방교구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상돈과 같은 훌륭한 평신도 신자들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며 "평생을 민족운동가와 자선사업가로 살아온 서상돈 선생은 천주교뿐만 아니라 대구의 자랑거리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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