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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돈 재산 담보 8천냥 빌려 지은 '계산성당'

대구대교구 설립 기여

서상돈은 대구대교구 설립의 기초를 닦은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일인 2011년 4월 8일 대구대교구 교구청 본관 앞에서 열린 서상돈 선생 흉상 제막식 모습. 매일신문 DB
서상돈은 대구대교구 설립의 기초를 닦은 훌륭한 평신도 지도자였다. 교구 설정 100주년 기념일인 2011년 4월 8일 대구대교구 교구청 본관 앞에서 열린 서상돈 선생 흉상 제막식 모습. 매일신문 DB

1911년 7월 5일. 대구대교구 초대 교구장 드망즈 주교에게 한 남성이 찾아왔다. 남성은 "자신의 남산동 종묘원 1만 평을 교구에 바치겠다"고 했다. 이 땅은 훗날 100년 천주교 역사를 담은 대구대교구청이 된다. 교구에 땅을 바친 남성은 독립운동가 서상돈이다. 대구대교구 100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서상돈과 천주교의 인연은 고조부(서광수)의 천주교 입교로 시작됐다.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서상돈이 천주교 박해를 피해 대구로 와 보부상을 시작할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건 김수환 추기경의 외조부 서용서 등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그 덕분에 서상돈은 30대에 거상(巨商)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서상돈은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평신도 지도자로서 평생을 전교활동과 구휼사업에 힘썼다. 또한 대구가 남방 교구 중심지로 결정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서상돈은 한옥 성당이 불타자 새 성당을 짓기 위한 공사 자금을 마련하고자 자신의 전 재산을 담보로 8천냥을 빌렸다. 이 성당이 영남지최초로 서양식으로 지어진 계산성당이다. 이후 계산성당은 남방 교구를 대구에 설립하는 이유가 됐다.

대구교구가 설립되고 난 후에도 서상돈은 교구 발전을 위해 힘썼다. 드망즈 주교가 부임하고 난 뒤 머물 곳이 마땅치 않자 임시주교관을 마련했으며 후에는 주교관, 신학교, 수녀원 터전을 만들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건물이 완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채 1913년 세상을 떠났다.

정태우 천주교 대구대교구 문화홍보실장은 "대구가 남방교구 중심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서상돈과 같은 훌륭한 평신도 신자들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며 "평생을 민족운동가와 자선사업가로 살아온 서상돈 선생은 천주교뿐만 아니라 대구의 자랑거리다"고 말했다.

신선화기자 freshgirl@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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