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건강편지] 인연

정 선생은 남편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내 대학 선배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 결혼식에 올 수가 없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이 정 선생의 젊은 형수 장례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27살이었던 나는 죽음을 지금처럼 깊숙이 몰랐다. 그렇지만 마음 한구석이 짠했다. 누구는 인생의 새 출발인 결혼을 하고, 누구는 세상과의 영원한 이별을 하고.

그로부터 23년 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애틋한 그 여인과 다시 인연이 닿았다. "형수님의 어머니가 말기 암인가 봅니다. 상담하러 가시면 잘 부탁해요"라는 정 선생의 전화를 받았다. 아직도 형수라고 부르는 정 선생의 목소리가 애잔하게 들렸다.

정 선생의 소개로 입원한 환자는 말기 대장암을 앓고 있었다. 다행히 환자는 편안하고도 넉넉해 보였다. 환자는 재혼한 사위의 병문안을 극진히 받았고, 마지막에는 딸이 남겨준 건장한 외손자와 예쁜 손녀딸의 손을 부여잡고 떠나갔다. 젊은 딸의 죽음 뒤에 이어지는 어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안 당해 본 사람은 모를 터이다.

그러나 힘든 시간을 아름답게도 만들 수 있는 것이 인간의 힘이었다. 유방암으로 떠난 딸에게 극진했던 사위의 고마움을 마지막 순간까지도 환자는 잊지 않았다. 항상 진실은 바닥에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이 오면 숨김없이 드러냈다.

사람들은 젊어서 죽을 병에 걸리면 어리석게도 남아있는 건강한 배우자를 탓한다. '모르긴 해도 병에 걸릴 만큼 많이 힘들게 했을 거야'라는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한다. 그러면 죽음 뒤의 삶이 뒤틀어진다. 사위가 아무리 딸을 위해 최선을 다해도, 제수씨가 아무리 애달게 동생을 돌봐도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런 사람들은 호스피스 팀에게도 거칠다. 같은 병실의 환자라고 봐 주지도 않는다.

45세 상철 씨는 예민했다. 앞에 있던 할머니가 위독해져 딸이 심하게 울자, 버럭 화를 냈다. 병실의 TV 채널도 항상 자기 위주였다. 다른 환자나 보호자는 젊은 사람이 아프니 참았다.

딱 2주일 후, 상철 씨가 나빠지자 그의 누나와 형들이 병실을 가득 메웠고 심하게 슬퍼했다. 상철 씨가 화를 낸 상황을 스스로 만들고야 말았다.

그날 따라 떠나는 사람이 많아 곧장 임종실을 쓸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상철 씨 아내는 그날 밥을 한 끼도 못 챙겨 먹는 것 같았다. 시댁 식구들은 깡마른 상철 씨 아내한테 어린 아들 생각해서 밥 챙겨 먹으라는 말도 안 했다.

퇴근할 무렵 시댁식구들이 사라지자, 상철 씨 부인은 다 식어 빠진 상철 씨의 죽을 쭈그리고 앉아 먹고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죽음이 일찍 와서 불행한 사람이 아니고, 죽음이 일찍 올 수밖에 없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다.

김여환

대구의료원 호스피스'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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