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새마을운동, 세계의 희망으로] <11> 필리핀 잠발레스주 산펠리페시 발렝카깅마을

술·노름에 빠졌던 주민들 돼지 15마리 종잣돈 삼아 '갱생'

필리핀 발렝카깅 마을 주민이 새마을운동과 함께 도입한 돼지 사육장에서 사료를 주며 돼지를 키우고 있다. 이 돼지는 소득증대사업으로 경북도 새마을봉사단이 지난해 이 마을 4개 부락에 각각 15마리씩 지원한 것이다.
필리핀 발렝카깅 마을 주민이 새마을운동과 함께 도입한 돼지 사육장에서 사료를 주며 돼지를 키우고 있다. 이 돼지는 소득증대사업으로 경북도 새마을봉사단이 지난해 이 마을 4개 부락에 각각 15마리씩 지원한 것이다.
발렝카깅 마을 초등학생들이 대형 사전을 펼쳐 놓고 수업하고 있다. 경북도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시설을 보수하고 교보재를 지원했다.
발렝카깅 마을 초등학생들이 대형 사전을 펼쳐 놓고 수업하고 있다. 경북도가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시설을 보수하고 교보재를 지원했다.
돼지 사육장에 경북 새마을 양돈 사업장 간판이 세워져 있다.
돼지 사육장에 경북 새마을 양돈 사업장 간판이 세워져 있다.
부녀회원들이 발렝카깅 마을 봉제공장에서 각종 제품을 만들고 있다. 주민들은 자체 디자인한 상품을 판매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부녀회원들이 발렝카깅 마을 봉제공장에서 각종 제품을 만들고 있다. 주민들은 자체 디자인한 상품을 판매해 소득을 올리고 있다.

50년 전 필리핀의 위상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1946년 미국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고, 아시아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소득수준이 높았다. 한국전쟁 당시 7천400여 명에 이르는 군인을 파병했고, 전쟁 후에도 재건을 도왔다. 1960년대까지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의 3배가 넘었다.

그러나 1960년대를 기점으로 필리핀과 한국의 경제 운명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과 새마을운동으로 빈곤의 굴레를 벗어났던 한국과 달리 필리핀은 농업 위주의 산업 구조를 벗지 못했다. 정치적 불안이 계속됐고, 부패가 만연했다. 국부는 소수에게 집중되며 빈부 격차는 날로 극심해졌다. 2011년 현재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2천255달러로 한국(2만3천749달러)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필리핀은 새마을운동이 옛 영광을 회복하는 중요한 열쇠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느리지만 변화는 확실하다. 경북도가 지난해부터 새마을운동을 보급하고 있는 필리핀 산펠리페시가 대표적이다. 이곳은 수도인 마닐라에서 200㎞ 떨어진 조용한 소도시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특별한 산업이나 관광자원도 없는 외딴 도시. 하지만 새마을운동과 함께 이곳에도 희망의 바람이 불고 있다.

◆다양한 소득 사업 모색

아시아 최대 물류항인 수빅항에서 차로 40분을 달리면 산펠리페시다. 인구 2만2천여 명이 사는 작은 도시다. 중심가는 2차로 도로 양쪽에 들어선 상점들이 전부고, 시청사는 어지간한 동주민센터보다 작다. 주민들은 주로 농사와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시내에서 차로 10여 분을 달리면 발렝카깅마을에 도착한다. 220가구, 978명이 살고 있는 산 중턱 외딴 마을이다.

깔끔하게 지은 새마을회관 앞 돼지사육장이 자리 잡았다. 벽면에는 새싹 표식과 함께 '경북 새마을운동'이라 적혀 있다. 주민들은 연신 돈사를 청소하고 사료를 주며 돼지들을 돌봤다. 지난해 7월 마을을 방문한 경북도 새마을봉사단은 4개 푸록(Purok'부락)에 각각 돼지 15마리를 지원했다. 돼지를 키울 돈사를 세워주고 사료도 챙겼다. 주민 28가구는 4가구씩 조를 나눠 돌아가며 돼지들을 돌보고 있다. 그 덕분에 주민들은 지난 1년간 돼지 13마리를 팔아 1만페소(한화 약 24만원) 가까운 소득을 올렸다. 아직 큰 소득은 아니지만 장기적으로 사육 두수를 늘려 주요 소득 사업으로 키우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돼지사육장 근처 직사각형 모양의 나무틀에는 시커먼 흙이 가득 담겨 있었다. 손으로 흙을 뒤집자 꼬물거리는 지렁이 10여 마리가 잡힌다. 지렁이 사육장이다. 지렁이를 기른 흙을 퇴비로 사용해 땅을 기름지게 하고 이웃마을에 팔아 소득도 올린다. 지렁이 사업을 시작한 후 비료 사용이 줄었는데도 생산량은 2배가 늘었다. 땅심을 돋우는 친환경 농업인 셈이다. 마을 대표인 나폴리온 도밍고(47) 씨는 "다양한 소득 증대 사업이 시작되면서 주민들의 생활패턴이 달라졌다"고 했다. "시간 나면 노름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놀던 주민들이 돼지 키우기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마을 발전 방안을 토의하기 위해 회의를 열면 적극적으로 의견도 냅니다. 수동적이던 주민들이 조직적이고 능동적으로 바뀐 겁니다."

인근 푸록에서는 재봉 공장이 한창 돌아가고 있었다. 주민 20여 명이 쉴 새 없이 재봉틀을 돌리며 방석을 만든다. 남는 천으로는 뜨거운 그릇을 집는 장갑도 만든다. 이곳에서 생산하는 방석은 하루 80여 개. 대부분 전통시장을 통해 판매한다. 'GB'라는 마을 브랜드도 만들어 방석에 박아넣었다. 'GB'는 'Gawang Balincaguing'의 약자로 '발렝카깅 제작'이라는 뜻이다. 매달 7천~1만페소를 벌어 일부는 일당으로 제공하고 나머지는 은행에 적립한다. 데레사 메이 사방한(46'여) 씨는 "재봉 기술이 있어도 돈도, 재봉틀도 없어서 농사만 지었다"며 "지금은 번 돈을 아이들의 교육비로 쓴다"고 말했다. 소득이 교육 지원으로 연결되고 교육은 빈곤 탈출의 계기가 되는 선순환이 이뤄지는 셈이다.

◆교육을 통해 빈곤 탈출

마을 안 유치원 교실에서는 아이들이 교육용 동영상에 흠뻑 빠져 있었다. 빔프로젝트와 컴퓨터를 활용한 교육이다. 낯선 한국인을 본 아이들이 대뜸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다. 아이들이 있는 곳에는 늘 한국어가 터져 나왔다. 새마을봉사단원들이 가르친 덕분이다. 봉사단은 지난해 미니도서관을 짓고 축구공과 배구공, 농구공 등 각종 체육용품을 지원했다. 교육 기자재를 교체했고 낡은 유치원 건물도 개축했다. 간이 시설에서 공부하던 아이들은 번듯한 학교를 갖게 된 것. 도서관이 생기면서 아이들은 마냥 놀지 않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됐다. 학업 능력도 향상됐다. 교육은 빈곤 탈출의 계기가 된다. 필리핀의 교육열은 높은 편이다. 문맹률도 10% 미만이다. 그러나 교육 환경이 열악하고 교보재가 부족해 효과적인 수업에 어려움을 겪는다. 비키 다시(40'여) 발렝카깅 초등학교 교장은 "이만한 교육 환경은 다른 마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며 "나은 교육 환경은 아직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학생들을 학교로 불러들이고, 아이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말했다.

새마을교육은 주민들의 인식을 바꿨다. 협동의 의미를 일깨웠고,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주민들은 지역농부연합을 결성해 공동 작업을 지속하고 있다. 자신이 번 소득의 15%를 내고 협업하는 방식이다. 지난 2011년 캐롤린 파리나스 산펠리페 시장 등 대표단은 경북도를 방문해 새마을운동과 농업발전 노하우를 배우기도 했다. 캐롤린 시장은 "발렝카깅 마을은 벌써 마을기금으로 300만페소를 적립했다. 주민들이 돈을 내고 조직을 구성하는 건 새마을운동이 도입된 발렝카깅 마을이 처음"이라며 "주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북돋우고 교육의 질을 높였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필리핀 잠발레스주에서 장성현기자jacksoul@msnet.co.kr

사진'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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