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성률의 줌인] 야사영화의 재미와 한계

정사와 야사 사이

원래 정사(正史)보다 야사(野史)가 재미있는 법이다. 정사는 철저하게 지배자의 시선에 의해 서술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에서 외워야 하는 딱딱한 대상에 가깝지만, 야사는 민중의 시선으로 창조한 재미있는 스토리적 유희에 가깝다. 정사의 딱딱함을 부드럽게, 또는 능청스럽게 깨뜨리면서, 민중의 역사 인식이 들어 있으니 어찌 흥미롭지 않겠는가? 게다가 야사에는 민중의 간절한 소망이 녹아있다. 국가의 혼란이 심할 때 수많은 영웅 신화의 야사가 등장한 것을 보라. 그런 영웅이 민중을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주길 강하게 갈구한 것이다.

'우아한 세계'로 새로운 조폭 영화의 장을 만든 한재림 감독이 7년 만에 내놓은 작품 '관상'은 야사에 바탕한 유희적 이야기가, 맛이 있는 영화이다. 제목에서 이미 알 수 있는 것처럼, 관상쟁이의 이야기. 우리나라 사람치고 관상에 관심이 없는 이가 있나? 누구나 관상과 손금에는 조금씩이라도 흥미가 있으니, 추석 시즌에 내놓기에 좋은 영화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머리는 하늘이니 높고 둥글어야 하고, 해와 달은 눈이니 맑고 빛나야 하며, 이마와 코는 산악이니 보기 좋게 솟아야 하고, 나무와 풀은 머리카락과 수염이니 맑고 수려해야 한다. 이렇듯 사람의 얼굴에는 자연의 이치 그대로 세상 삼라만상이 모두 담겨 있으니, 그 자체로 우주이다." 이는 극 중 관상쟁이 김내경이 하는 말인데, 우리 조상의 자연관과 철학관이 그대로 담겨 있는 대목이다. 이것을 확대하면 주역으로 이어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나 영화는 관상에 대해 그리 깊게 다가가기보다는 관상을 둘러싼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펼쳐내려 한다. 당연히 영화가 흥미로우려면 갈등이 그럴 듯해야 한다. 그래서 영화적 배경이 등장하고, 그 배경을 토대로 갈등을 조성한다.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아보는 천재 관상가 김내경은 기생 연홍의 제안으로 한양에 온다. 우연히 사헌부의 일을 봐주었다가 김종서의 눈에 들어 갓 등용한 인재들의 상을 보게 된다. 이제 갈등은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대결로 치닫게 된다. 병이 든 문종은 김내경을 불러 어린 세자를 부탁하고, 이내 죽고 만다. 이제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힘겨루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김내경은 그 사이에서 김종서의 우직함을 옹호한다.

'관상'의 재미는 초반, 김내경으로 분한 송강호와 그의 처남 팽헌으로 분한 조정석이 거의 스탠드 개그처럼 펼치는 코미디에 있다. 두 사람은 그야말로 콤비를 이루어 수시로 웃음을 만들어낸다. 근래에 보기 드문, 송강호가 치고 나가면 조정석이 무리 하지 않으면서 받쳐주는 명콤비의 코미디가 꽤 많은 장면에 포진해 있어 오랫동안 보는 이를 즐겁게 만든다.

야사의 재미도 한 부분 한다. 한낱 관상쟁이에게 임금이 보위와 안녕을 부탁하고, 김종서와 수양대군이 한낱 관상쟁이를 얻으려고 분투를 하고 있다는 점, 더 나아가, 나라의 운명을 관상쟁이가 짊어지고 있는 상황이, 이미 정해진 역사의 슬픈 현실을 덮고 잠시나마 다른 이야기, 즉 야사의 즐거움 속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 펼쳐질 것인가?

그러나 영화는 지나치게 유명한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이것이 약점이 되었다. 관상쟁이가 문종이라는 정사로 들어오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이미 정해진 역사,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 사이에 어떤 반전을 넣어 민중의 소망을 풀어놓으면서 안타깝고 냉철한, 정해진 역사의 길을 가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관상'은 그리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 수양대군을 처음부터 끝까지 악인으로, 김종서를 선인으로 설정한 후 그 구도 속으로 몰고 가면서 정해진 정사와 똑같이 스토리를 끌고 가려다 보니 긴장감도 떨어지고, 역사 해석도 실패했다. 단지 재미있는 에피소드 정도에 머물고 만다. 작은 붓질은 좋은 부분이 꽤 많지만 큰 그림은 그리 볼만한 것이 아닌 꼴이다.

관상이라는, 우리가 꽤나 좋아하는 이야기를 들고 나왔다면 야사로서의 역사 해석이 코믹한 설정과 잘 맞아 뭔가 새로운 것, 적어도 당시 민중들의 욕망을 제대로 풀어헤쳐 놓아야 하는데, 기존의 궁중 영화가 그런 것처럼 정치적 패권을 둘러싼 음모와 배반의 역사에 머물러, 결국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말았다. 이 영화의 실패 지점은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관상'은 '왕의 남자'나 '광해'에서 배워야 했었다. 야사를 야사답게 만드는 그 방법을.

마지막으로 주목할 것. 어느 해보다 뜨거웠던 지난여름을 지배했던 영화는 지금의 정치 상황을 강하게 비판한 영화들이었다. 주거 문제에서부터 언론, 정치, 외교적 자주권, 신자유주의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내용을 다루면서 현실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상'은 정해진 역사 안으로, 그 패배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기꺼이 패배하는 아픔을 이야기하며, 결국 정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쿠데타도 막을 수 없었으며, 그래서 민중의 소망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정치적 허무주의 냄새를 슬쩍 흘리고 있다. 이제 손에 피를 묻힌 수양은 세조가 되었다. 이 차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원론적인 의문. 영화는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는가? 사회의 반영이 영화인가, 영화의 반영이 사회인가?

강성률 _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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