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노비 해방·계급 타파" 부친 진보 사상 받아

심산은 선비정신의 마지막 표상이었다. 독립운동 시절이나 해방 후 선비의 자세를 잃지 않았다.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 의성 김씨 가문의 선비였던 그의 기반은 유림이었다. 뜻을 같이한 이들도 대부분 유림이었고 그 자신 후일 유림의 상징적 존재가 됐다. 심산은 고담준론을 벗어난 실천적 유교이념으로 일관했다. 심산의 실천적 정신은 그의 아버지에게서 배운 바가 컸다. 아버지 김호림(호 하강)은 당대 거유들과 교유하면서도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계급을 타파하고 노비를 해방해야 한다는 선각적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다. 동학혁명 당시 고을마다 돈 많고 지체 높은 양반들이 수난을 당하였지만 김호림이 살던 마을을 지나는 동학군들은 '이곳은 김하강의 마을이다. 조심하여 범하지 말라'며 피해갈 정도였다.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났을 때 의병봉기 격문을 돌리던 김호림은 관찰사와 고을 원이 겁주며 말릴 때 '마음은 몸의 주인이고 몸은 마음의 집이라 집 없는 주인이 될지언정 주인 없는 집이 되지는 않겠다'는 시를 지어보이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후일 병보석으로 나와 요양하던 시절 지은 '아버님 하강공의 유사'에서 심산은 아버지를 이렇게 평하였다. "남이 착한 것을 보면 기리기를 아끼지 아니하고 남의 허물을 들으면 직접 간곡하게 일깨워주었다. 이로인해 어진 사람들은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어질지 못한 사람들도 몹시 두려워하였다."

심산은 이어 아버지의 선각자적 정신이 엿보이는 일화도 소개했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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