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실천하는 선비정신 心山 김창숙] ⑤독립기지 건설을 위한 국내 모금활동

"친일 부호 머리를 독립문에 내걸지 않고 어찌 독립이 오리"

백범 김구와 함께한 심산 김창숙.
백범 김구와 함께한 심산 김창숙.
서울 서초구 반포근린공원 내에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2011년 3월 건립된 심산기념관.
서울 서초구 반포근린공원 내에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2011년 3월 건립된 심산기념관.

◆황무지를 빌려달라

우당 이회영과 심산의 우의는 두터웠다. 독립운동 대선배인 우당을 존경한데다 우당 역시 심산의 곧고 굳은 심지를 존중했다. 중국으로 망명한 지 5년쯤 된 어느 날 심산은 우당에게 이런 뜻을 밝혔다. "우리 독립운동의 장래를 내다볼 때 짧은 시일 안에 성취하기는 어렵게 됐다. 일본인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열하(중국 북동부 지방) 등지의 경작이 가능한 황무지를 얻어 동포들을 이주시켜 실력을 기르는 것이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한다." 우당 역시 좋은 생각이라고 화답했다. 그러나 실천할 땅과 자금이 없었다.

가까이 지내는 중국 정계의 요인들을 찾아 의논해보라는 우당의 충고대로 중국 참의원 의원 이몽경을 찾아갔다. 반응이 좋았다. 한중 양국의 혁명은 서로 협조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데 중국이 황무지를 빌려주는 것을 아까워하겠느냐고 했다. 열하를 지배하는 풍옥상 장군과 상의하라며 전 외교총장 서겸이 풍옥상과 아주 친한 사이이니 그에게 부탁하라고 했다. 서겸은 심산과도 친교가 깊었다. 서겸은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흔쾌히 중재에 나서겠다고 했다. 답이 왔다. 열하에는 마땅한 땅이 없으나 수원, 포두(중국 북부 내몽골 지방)에 개간할 만한 3만 정보(町步)의 땅이 있다며 적당히 이용하라고 승낙했다는 것이었다.

독립기지를 건설하겠다는 계획은 일단 순조롭게 출발했다.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 개간 자금까지 중국에 빌려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방법은 국내에서 동포들의 성금을 모으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를 뚫고 비밀리에 추진해야 할 모금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몰래 들어가 일을 추진할 사람도 마땅찮았다. 심산은 직접 국내로 잠입하기로 작정했다. 마침 영남의 거유 곽종석의 문집을 간행하기 위해 전국의 유림들이 서울에 모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송영우 이봉노 김화식이 뜻을 같이하겠다고 했다. 일은 극비리에 추진됐다. 국내 잠입은 신채호에게만 알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만주에 간다고 둘러댔다. 신채호에게 맡겨 공부하도록 한 아들 환기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국내 잠입

하얼빈에서 10여 일 머문 뒤 거친 베옷의 농부차림으로 변장한 채 압록강을 건넜다. 신의주에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일제의 감시와 학정으로 국민들의 고통은 깊어졌지만 6년 만에 다시 본 고국의 강산은 여전했다. 먼저 출발한 송영우 김화식을 곽종석선생문집 간행소에 보내 곽윤과 족숙 김황을 불렀다. 죽음을 무릅쓰고 국내로 잠입한 사정을 설명했다. 곽윤을 경북으로, 김황을 경남으로 보냈다. 재산이 많은 친척이나 지인들을 만나 뜻을 전하라고 했다. 힘을 보태겠다는 동지들을 경주, 봉화, 영주, 진주, 함양으로 보냈다. 며칠 후 돈 대신 귀순할 의향이 있느냐는 전갈이 먼저 왔다. 진주로 내려간 이가 '경무국에 귀순을 알선해 주겠다'는 부호의 말을 전했다. 심산은 불같이 화를 내며 꾸짖었다. "친일하는 부호의 머리를 독립문 위에 내걸지 않고서는 한국이 독립할 날은 없다."

심산은 서울 적선동의 구석진 방에 몸을 숨겼다.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비 오는 어느 날 왜경 하나가 검문을 나왔다. 심산의 몸과 행장을 뒤지고 꼬치꼬치 물었다. 집주인이 대답한 이름과 심산이 일러준 이름이 같지 않다며 심산을 파출소로 연행하기조차 했다. 몇 시간이나 언쟁한 끝에 다행히 왜경은 심산을 돌려보냈다. 전날 종로에서 일어난 절도범을 쫓던 왜경이 적선동 일대 가옥을 수색하다 빚어진 일이었다. 당장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금강산으로 거처를 옮겼다. 나라는 빼앗겼지만 구름같이 많은 사람들이 금강산에 몰려들었다. 하마터면 안면 있는 사람의 눈에 종적이 탄로 날 뻔했다. 만물상 해금강을 지척에 두고도 여관방에만 들어앉은 채 바깥출입을 삼갔다. 여관 주인이 귀띔했다. 수십일 동안 방안에만 있으면서 전보만 주고받는 그를 왜경이 뒷조사한다는 것이었다. 바로 금강산을 떠나 서울로 돌아왔다.

◆지지부진한 모금

모금활동은 별 성과가 없었다. 냉담하게 불응하는 이가 대다수였고 응한다 해도 기껏 노잣돈 정도였다. 기호 관서지방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직접 영남을 찾기로 작정했다. 대구로 내려갔다. 믿을 만한 일가친척과 지인들을 안동 영주에서부터 마산 부산으로 보냈다. 영남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대부분 냉담했다. 대구에서도 왜경의 검문을 받았다. 대구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울산으로 옮기던 중 타고 가던 버스가 낭떠러지로 굴렀다. 허리를 다쳐 움직일 수 없었다. 왜경 수십 명이 달려왔다. 알아보는 이가 있을까 걱정했으나 다행히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울산 손진수의 집에서 수십 일을 누워 있었다. 손진수와 그의 아들은 밤이나 낮이나 대소변까지 받아내며 간병해주었다. 심산은 자서전에서 '가족이나 처자식이라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고 이들 부자에 대한 고마움을 기록했다.

사위 이동립이 사돈 이재락의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자기 집으로 와서 부녀간의 정을 풀라고 청했다. 둘째 딸을 출가시킬 때 그는 이미 국외로 나간 뒤였다. 왜경의 이목을 들어 사양했다. 종제 김창백이 왜경이 사방으로 정탐, 사태가 심각하다고 했다. 진퇴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었다. 사돈이 다시 청했다. 이재락의 집으로 갔다. 이재락은 "사돈 같은 귀빈을 맞으면서 사돈이란 말도 못한 일이 고금에 있었느냐"며 과객방으로 안내했다. 부녀의 상봉은 집안 비복들의 이목을 피해 닭이 몇 홰를 치고서야 이뤄졌다.

◆다시 중국으로

범어사 금강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동지들을 불러 8개월여의 모금활동에 대한 소회를 말했다. 여러 사람들이 호응해 주리라 기대했지만 성과는 기대 이하인 데다 왜경의 추적은 코앞까지 다가와 이미 일은 낭패라고 밝혔다. 압록강을 넘어갈 면목은 없지만 한번 실패로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것도 혁명가의 일이 아니라며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황무지 개간자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모금액은 중국에서 활동 중인 의열단 결사대에게 넘겨 왜정 기관을 파괴하고 친일 부호들을 박멸하는 일에 쓰겠다고 밝혔다. 그리하여 국민들의 독립정신을 고무시키겠노라고 했다. 송영우 김화식에게 뒷일의 수습을 당부한 다음 심산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 봉천으로 돌아갔다. 목숨을 건 모금활동은 일제를 두려워한 부호들의 냉담과 일경의 압박으로 실패했다. 모금의 실패는 심산에게 '국민들의 마음에 불을 지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했다. 기운을 고무시킨다면 언젠가 국민들이 일제히 일어나리라는 믿음으로 새로운 투쟁의지를 다졌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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