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 세운 대의 끝까지 지켜
빼앗긴 나라 안에서는 왜적의 총칼에 맞설 수 없어 만주나 상해 북경으로 떠나야 했던 항일 독립 운동가들은 일경의 끈질긴 추적으로 속속 붙잡혀 영어의 몸으로 귀국했다. 제 나라를 찾겠다는 주인이 강도에게 되레 도적으로 몰린 것이다. 김창숙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심산은 몸은 포승줄로 묶였으나 마음은 꺾이지 않았다. 한 번 세운 대의를 끝까지 지켰다. 일본의 법정에서는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심산은 처음 찾아온 두 명의 변호사에게 "정의를 찾으면 죽어도 영광인데 병든 몸 구차히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며 변호를 사양했다. 그러나 가족과 친지 친구들은 달랐다. 매일같이 와서는 변호사를 거절하지 말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심산은 요지부동이었다. 누가 뭐래도 대의를 굽히지 않겠다는 게 심산의 확고부동한 의지였다.
다시 김완섭이란 젊은 변호사가 찾아왔다. 변호를 위임해 달라고 간청했다. 몇 번이나 거절했으나 변호사도 고집을 꺾지 않고 다시 찾아왔다. 간수를 통해 만나지 않겠다고 하면 만나보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며 버텼다. 변호를 거절하는 진의를 듣지 않고서는 물러갈 수 없다고 했다. 심산이 변호사를 거절하는 이유를 말했다.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의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부탁한다면 그것은 대의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다. 나를 변호하겠다는 변호사들은 모두 일본 법률론자인데 일본 법률로써 대한 사람 김창숙을 변호하려는 것은 애당초 자격부터 갖추지 못했다. 자격조차 갖추지 못한 채 억지로 변호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변호사가 무슨 말로 나를 변호해 줄 수 있겠나. 나는 포로다. 포로가 되어 구차스럽게 살고자 하는 것은 치욕이다. 나는 내 지조를 팔고 남에게 변호를 부탁하여 살아남기를 바라지 않는다."
심산의 말을 들은 변호사는 "선생께서 이처럼 격렬한 논조를 펼 줄 미처 몰랐다"며 입회한 간수의 기록이 조서에 들어가 재판에 불리하게 작용할까 염려했다. 변호사에게 심산이 던진 말이다. "나의 생사는 이미 관심 밖에 둔 지가 오래되었으니 걱정하지 말라."
◆14년형 선고
검사는 심산에게 살인미수, 제령 위반, 치안유지법 위반, 폭발물단속령 위반, 주거침입 등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구형했다. 판사는 14년 징역형을 선고했다. 친척과 친구들이 나서서 항소하라고 권했다. 변호마저 거절한 심산이 항소할 까닭이 없었다.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당시 심산의 몸은 만신창이였다. 원래 아픈 몸으로 끌려 온데다 고문 후유증이 겹쳤다. 양쪽 다리는 거의 마비 상태였다. 거동을 할 때면 부축을 받아야 했다. 감옥의 의사도 이런 중환자를 이감시킨다는 것은 너무 가혹하다고 할 지경이었다. 대전형무소에서는 병감에 수감됐다. 중환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지 반년 만에 형집행정지로 옥문을 나섰다. 곧바로 대구의 병원에 입원했다. 병문안을 온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살아남기 힘들 것이라고 걱정했다. 가족들과 일부 친척들은 서로 붙잡고 통곡했다. 수십일 이후에는 목숨이 조석간에 달릴 만큼 위급해졌다. 급기야 들것에 실려 고향 성주 사월리로 옮겨졌다. 나라를 찾겠다며 고향을 떠난 지 10년 만에 병든 몸으로 들것에 실려 고향을 찾은 것이다. 왜경 여럿이 따라와서 번갈아 감시했다. 한 달쯤 지난 뒤 법원의 간부가 의사를 데리고 와서 심산을 진찰했다. 며칠 후 왜경 10여 명이 들이닥쳐 그를 교자에 태워 다시 대구형무소에 집어넣었다. 감옥 의사마저도 놀랄 만치 병세는 심각했다. 고집불통의 완고한 독립운동가를 고향에 그냥 두기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 대전형무소로 이감됐다. 대전형무소의 옥의는 심산을 병감에 수감하고는 그에게 간병인 한 사람을 붙여 주었다. 간병인은 항상 옆에 있으면서 눕고 일어나기는 물론 용변을 보는 일까지 도와주었다. 심산은 옥리와 싸워 책과 문방도구를 구입했다. 책을 읽고 심오한 이치를 따져보며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다. 근심을 잊고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비로소 감옥 속의 세월도 나쁘지 않음을 알게 됐다.
◆옥중 투쟁
형무소 정원에서 일광욕을 할 때였다. 신임 전옥이 병감을 순시했다. 간수가 죄수들에게 일어나 경례토록 했다. 전옥이 앞으로 다가오자 심산과 이야기를 나누던 이가 황망히 일어나 절을 했다. 심산은 못 본 체하고 고개도 끄덕이지 않았다. 전옥이 간수를 불러 죄수가 전옥을 보고 절을 않는 것은 단속이 엄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꾸짖었다. 간수가 전옥의 말을 전하자 심산은 "감옥에 들어온 지 6, 7년이 지났지만 지금껏 옥리를 보고 머리 한 번 숙여 본 적이 없다"며 무시했다. 나는 위협한다고 굽힐 사람이 아니다는 말도 덧붙였다. 전옥이 계속 절을 하도록 독촉했다. 심산도 완강히 거부했다. 어느 날 전옥이 심산을 찾아와 고함쳤다. "죄수로서 절을 하지 않는 것은 매우 무례한 일이다. 일어나 절을 하라."
일본의 옥리에게 절을 하지 않는 이유를 심산이 말했다. "내가 너희에게 절을 하지 않는 것은 독립운동의 정신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절은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내가 너희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화를 내는 전옥에게 심산은 "너희가 성내고 꾸짖는다고 절을 하진 않는다"며 준엄하게 거절했다.
병실에 있던 책과 문방도구를 간수들이 몰수해 갔다. 처벌 방법을 궁리하던 옥리들은 중환자인 심산에게 마땅한 벌칙을 찾지 못해 잡범들이 우글거리는 방으로 옮기게 했다. 읽을 책은 한 권도 남기지 않았다. 당시의 울분을 토로한 심산의 시다. '7년 세월 죄수로 몸져누었으나/ 나의 본 자세를 지켜왔노라/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 될 말인가/ 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는구나.'
간수는 여운형과 안창호가 대전형무소에 있을 동안 옥리에게 절을 하고 감방 규칙을 잘 지키는 것으로 알려져 가출옥의 특전을 받았다며 심산을 회유했다. 그러나 심산은 "그는 그고 나는 나다"라며 귀담아듣지 않았다.
공산당원과 무정부주의자의 전향 성명서를 읽게 하던 전옥이 최남선의 일선융화론을 보내왔다. 일선융화론은 한민족과 일본 민족은 모두 시베리아에서 일어나 남쪽 한반도로, 또 일본으로 건너가 오늘에 이르렀다며 양 민족은 동일한 혈통에 속한다고 시작했다. 심산은 책자를 집어던졌다. 간수가 지필묵을 주며 감상문을 쓰라고 했다. 심산이 비분하여 시 한 수를 써 주었다. 양근환이 친일파 민원식을 죽인 사실을 내용으로 한 시였다. 14년 장기수가 이런 과격한 논조를 펴면 어찌 살아나 옥문을 나서겠느냐며 간수는 심산을 달랬다. 화를 자초하는 대신 감상문을 쓰라고 했다. 그러나 심산의 대의를 일본의 옥리들이 어찌 꺾을 수 있을까. 고통이 따를지언정 대의를 굽힐 심산이 아니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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