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 할머니가 희멀거니 잘 생긴 아들과 함께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나갔다. 그런데 아들이 소희 할머니한테 찬물을 막 퍼부으면서 죽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상황이 이쯤 되자 병원의 누군가가 알려줬다. 막되 먹은 행동을 하니까 지나가던 행인이 112에 신고를 해서 경찰도 왔다. 소희 할머니는 처벌을 원하지 않았고, 아들도 사과를 해서 경찰의 훈방조치로 일단락이 됐다. 폐암이 머리까지 전이된 소희 할머니는 그 사건으로 풀이 많이 죽었다. 잠잠해졌던 통증까지 생겼다.
소희 할머니는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다. 젊은 시절 바람 난 유부남과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식당일 하면서 억척같이 돈을 벌었으나 없는 살림에 병든 남편 수발하느라 겨우 장만한 집까지 홀라당 날렸다. 남편 제사를 지내는 본처 집에 아들을 보냈더니 이복형제한테 된통 당하고 돌아왔다. 사정이 이쯤 되면 하나뿐인 아들한테 잘할 만도 하는데 내 신세 망친 놈이라고 모진 말만 해대면서 거칠게 키웠다. 아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칭찬받은 적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금쪽같은 아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할 여유도 없이 정신없이 살다가 두 달 전에 말기 폐암에 걸려 버렸다. 그래도 이제는 마지막이라고 서울 살던 아들이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엄마가 있는 대구로 내려왔다. 엎치락뒤치락 병간호하는 중에 일이 터진 것이다.
상처가 곪으면 터져야 낫는 것처럼 사람 사이에서도 푹 곪은 상처가 있었다면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터져 버린다. 진실은 항상 바닥에 있다. 피할 수 없는 한계상황이 오면 숨김없이 드러낸다. 나는 '죽음'이라는 한계상황에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지 못하게 변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죽어가는 병든 어머니의 옆에서 젊은 간병사와 일인 병실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는 아들도 있었고, 배우자가 임종실에 있는데 예약해둔 치과진료를 받으러 가는 중년부인이나 검진을 받으러가는 철없는 남편도 있었다.
쌓인 분노가 밖으로 드러날 때도 있다. 위암에 걸린 할아버지가 할머니한테 죽 끓여 오시라고 했다가 야단맞았다. 병원에서 죽을 먹지 왜 자기한테 끓이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병든 엄마가 남긴 3천만원을 자기가 가져가야 한다며 나이든 오빠에게 대드는 여동생도 봤고, 화장이냐 매장이냐 때문에 죽어가는 아버지와 티격태격하는 딸도 봤다.
우리들 대다수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법률적이거나 도덕적으로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살기 때문에 악에 대한 예방접종을 받았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평소에 다듬어 놓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한계상황이 오면 크고 작은 사소한 악들이 나도 모르게 불쑥 튀어나올 수 있다. 그러나 희망적인 것은 반대의 경우가 더 많았다는 것이다.
김여환(대구의료원 호스피스 완화의료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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