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도청 국제비즈니스과 직원이 뉴질랜드에서 취재할 만한 사람을 추천했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의 영관 장교였는데 뉴질랜드에 정착해 보험 에이전트로 성공한 지역 출신 교민이 있다는 것이다. 육사 출신의 보험 에이전트라? 기자의 호기심이 발동했다.
오클랜드에서 'PKI'란 상호로 보험 에이전트를 하고 있는 김정현(61) 씨가 그 주인공. 오클랜드 공항에서 마중나온 김 씨를 만났을 때 느낌은 '천생군인'이었다. 예순을 넘긴 나이에도 다부진 체격, 절도 있는 동작과 말투, 그리고 장교 헤어스타일 등. 그런데 그가 속 깊은 정이 있는 사람이란 건 두 차례의 인터뷰 및 식사시간(특히 자택에서 식사 초대)을 통해 드러났다.
◆군인의 길 걷다 이민 선택
김 씨는 상주시 낙동면에서 태어나 김천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71년 육사에 입학했다.(육사 31기) 위관시절에는 대부분 전방 부대에서 근무를 했다. 영관이 된 이후에는 국방부 차관 보좌관을 하는 등 국방부에서 일했다. 동기생 가운데 항상 선두그룹에 포함돼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사는 녹록지 않았다. 대령 진급에 실패했다. "군인으로서 열심히 살고 진급에 대비해 공부도 열심히 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더군요. 대령 진급에서 미끄러지고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가정을 잘 돌보며 살자고 결심을 했죠. 새 삶의 출발을 외국에서 시작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필 뉴질랜드였을까? 이 대목에는 웃지 못할 사연이 있다. 부인 강수아(59) 씨의 설명이다. "처음에는 캐나다 이민을 계획했습니다. 그런데 캐나다 대사관이 남편의 육사 학력을 대졸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영주권을 받으려면 학력 점수가 필요하거든요. 캐나다 대사관을 나온 뒤 아래층에 있는 뉴질랜드 대사관으로 무작정 갔습니다. 거기서도 '육사 학력'에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대한민국 육사를 모르냐며 따지고 이수과목 등 관련 서류를 제출했더니 승인을 해 주더군요. 군 경력 20년까지 인정받았습니다."
김 씨는 우여곡절 끝에 이민 수속을 끝냈다. 1994년 9월 말 중령으로 전역하고 보름 뒤 가족과 함께 뉴질랜드 땅을 밟았다.
◆보험영업 19년째
그는 '군인정신(?)'으로 이민 왔다. 뉴질랜드에서 어떤 일을 할 지 계획이 없었다. '뭐든지 하면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 처음 6개월 동안 어학연수프로그램에 참가해 영어를 배웠다. 또 한인성당에서 사목회 일을 보며 사람들을 사귀었다. 9개월 만에 보험 에이전트를 하게 됐다. 보험회사에 다니던 선배가 추천해 준 것이다. "한국에서 경험했던 보험설계사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사양했습니다. 영업을 위해 술 마시고, 고객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일이 내키지 않았죠. 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도전하기로 했습니다. 아마 한국이었다면 그런 결심을 못했을 것입니다."
김 씨는 보험의 기본 업무도 제대로 모르던 터라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다. 그러나 꾸준히 노력하고 신뢰를 쌓은 결과, 고객들이 늘기 시작했다. "수입이 처음엔 월 3천달러 수준이었으나 오래지 않아 1만달러 정도로 늘었습니다. 군 경험도 밑거름이 됐죠. 군에서 지휘관으로 인사'장비'물자 등 조직 관리를 했는데 그 경험이 보험 일을 하는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보험영업 19년째. 그의 부인 표현대로 '길어야 3개월'이라고 했는데 첫 직업이 뉴질랜드에서 평생 직업이 되고 있다. '융통성 없는 원칙주의자' 캐릭터가 현지 보험영업 시장에서 먹혀든 셈이다. "보험 상품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신용과 정직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객들에게 믿음을 주는 에이전트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고객의 대부분이 우리 교민들인데, 이제는 그 분들이 대를 이어 저의 고객이 되고 있죠."
◆신앙에 충실, 그리고 봉사
김 씨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다. 신앙생활은 의지할 곳 없는 이역만리에서 뿌리를 내리는 데 도움을 줬다. 마음의 평화를 찾게 해준 것은 물론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다리가 돼 주었다. "이민 와서 지금까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성당에서 봉사하는 자리를 맡고 있습니다. 전례분과장을 5년 했고, 꾸리아단장을 3년 하면서 지역사회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또 2001년부터 3년 동안 아내와 함께 ME 대표를 하면서 부부상담 봉사를 하기도 했죠. 아내는 저보다 봉사활동에 더 적극적입니다. 허허."
그는 고향 경북을 위해서도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2006년 경북도 해외자문관(현재 해외자문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으며, 2011년부터는 경북도 독도수호 해외자문위원을 맡고 있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 뉴질랜드지회 설립(2011년 4월)에도 참여했고 현재 이 단체의 육군 부회장을 맡고 있다. 김 씨는 전역 후 해외 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해 대한민국재향군인회 회장 표창을 받기도 했다.
◆체면을 버려야
뉴질랜드에는 한국에서 온 고학력자들이 많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에서 쌓은 학력과 경력, 그리고 체면을 중시하는 바람에 경제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제가 보험영업을 하고 아내가 기념품 가게에서 일한다고 하니 일부 교민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체면을 내세우던 사람이 나중에 알고 보니 공항에서 청소 일을 하고 있더군요. 이민자금을 두둑하게 챙겨온 교민들 중 일부는 일을 하지 않고 폼만 잡다가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민생활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김 씨는 뉴질랜드 이민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당부했다. "뉴질랜드는 '깨끗한 나라'입니다.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려는 사람들에겐 좋은 곳입니다. 하지만 '한탕주의'나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은 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뉴질랜드는 그런 사람들에겐 호락호락한 나라가 아닙니다."
글'사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김교영기자 kimky@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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