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3일 경북대 의학전문대학원과 경북대 의과대학동창회 주최로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 '경북의대(의학강습소) 개교 9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엄 및 동문 화합의 밤'이 열린 것. 그간 경북대 의대의 개교 연도에 대해 여러 의견이 있었다. 의과대학 동창회는 대구의학전문학교가 문을 연 1933년을 첫 회로 봤고, 대학 측은 해방 후 경북대가 문을 연 1946년으로 봤다. 하지만 이번에 '개교 90주년'을 주창함으로써 경북대 의대의 시작은 192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쟁도시 평양에서 먼저 의학강습소 설립
사실 이런 주장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2000년 발간된 '경북대학교 병원사'에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1923년 7월 대구자혜의원 의관(醫官) 요시다 쥰이치로는 경상북도지사에게 사립 대구의학강습소의 설립을 청원해 7월 23일 인가받았다.'
당시 상황을 이해하려면 대구와 경쟁 관계에 있던 평양의 형편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근대 의료기관이 비슷한 시기에 들어선 대구와 평양 두 도시는 늘 선의의 경쟁 관계에 있었다. 당시 한국인으로서 의사가 되려면 1911년 제정된 '의사규칙'에 따라 조선총독이 정하는 의사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이 때문에 독학으로 의사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1907년 문을 연 동인의원이 있었을 때 의학교를 운영한 경험이 있는 대구와 평양 두 도시에서는 그런 열기가 더 뜨거웠다. 그런 가운데 평양이 선수를 치는 일이 생겼다. 1923년 1월 평양자혜의원 원장 우치무라가 의사시험에 응시할 독학도를 위한 2년제 사립 의학강습회를 자혜의원 내에 야간으로 설립했다. 이 강습회는 그해 4월에 2년제 도립 평양의학강습소로 승격됐다.
◆대구자혜의원 의관 요시다가 설립 청원
이런 자극 때문에 대구에서도 의학강습소가 생긴 것이다. '경북대학교 병원사'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서둘러 학생을 모집해 9월 1일 대구자혜의원의 의관과 의원, 대구중학교의 교유(교사) 등 14명을 강사로 위촉해 교수와 학생이 모여 개교식을 가지고, 9월 2일부터 대구자혜의원 건물 일부를 빌려 수업을 시작했다. 비록 초라했지만 이 사립 대구의학강습소의 개설로 경북대 의과대학의 역사가 시작됐다.' 공식적인 인정 여부를 떠나 이미 1923년을 의과대학의 시작으로 본 것이다.
병원 초창기 역사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자료를 찾던 경북대병원 김용선(영상의학과) 교수는 근대 건축사를 전공한 김주야 박사와 함께 의학강습소 설치를 청원한 '요시다 쥰이치로'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시간을 거슬러 가기로 결심했다. 워낙 자료가 부족한 상황이어서 길 찾기는 쉽지 않았다. 90년 만에 다시 조명된 요시다 쥰이치로에 대해 김용선 교수가 직접 작성한 내용을 싣는다. 내용은 짧게 요약돼 있지만 실제로는 이런 내용을 알아내기까지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대구의학전문학교 연혁의 첫 줄은 '1923년 7월 의관 요시다 쥰이치로가 사립 대구의학강습소를 인가받아…'라는 한 문장으로 시작됐다. '의학강습소'라는 명칭은 너무 초라해 보였고, 의학전문학교의 역사에 나오는 서류상의 한 줄로만 생각됐다. 그런데도 의학강습소 설립 90주년 행사를 앞두고 보니 시작 시점에 대한 자세한 상황을 밝힐 필요를 느끼게 됐다.
우리는 이미 동인의원-자혜의원의 역사적 논란을 10여 년간 펼치고 있어 자혜의원 내에 만들어진 대구의학강습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제대로 된 서류가 없는 상태였기 때문에 확실한 근거 자료를 찾는 데 주력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국가기록원에서 조선총독부령, 각종 문서들, 통계자료 등을 확인해 비로소 그 규모와 운영방식을 알게 됐고, 당시의 신문기사를 찾아서 문서에서는 볼 수 없었던 학생들과 시민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 창설자인 요시다 쥰이치로는 여전히 베일에 가린 미스터리의 인물이었다. 사진은 물론이고 출신 학교, 전공 분야, 기타 행적에 관한 어떠한 정보도 남아있지 않았다. 게다가 '요시다'라는 성과 '쥰이치로'라는 이름은 일본에서는 매우 흔한 것이어서 이 사람을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던 중 뜻밖에도 근대 건축사를 전공한 김주야 박사가 일본 유학 당시 접했던 '흥신록'이라는 인물사전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고, 일본으로 급히 이메일을 보냈다. 답장이 왔다. 요시다 쥰이치로는 시코쿠 가가와현 출생,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졸업, 대구자혜의원 외과부장, 청주자혜의원 원장 등 비교적 상세한 이력이었다.
그러나 사진도 없었고, 의학강습소 창설자의 이야기를 엮기에는 자료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런데 마지막 줄에 나온 부인과 자식들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것이 실마리를 푸는 결정적인 열쇠가 될 줄 그때는 몰랐다.
김 박사가 가족들의 이름을 일본 신문의 기사로 검색하던 중 2001년 시코쿠의 한 신문 부고란에 장남 요시다 요리노리와 같은 이름이 있다고 했다. 이 사람이 요시다 쥰이치로의 장남이면 모든 것이 해결되겠다고 생각했다.
우여곡절을 거쳐서 올여름 폭염의 도쿄 외곽 지바시에서 드디어 유족들을 만나게 됐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로 시작된 대화는 두 차례 방문으로 긴긴 시간 계속됐다. 유족들은 요시다 쥰이치로가 대구의학강습소를 창설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고, 그가 강의를 시작한 이래 그곳이 대학으로 바뀌고 8천여 명의 의사를 배출한 데 대해 놀라워했다.
유화를 즐겨 그리고, 골프를 좋아했으며, 도쿄에 있는 장남을 방학 때 대구로 불러 직접 영어교육을 시킨 일들, 대인관계가 극히 부드러워 여성들에게 인기가 좋았고, 마지막 암 투병 기간에도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수술실 옆에 자신의 병상을 두고 수술을 계속 했던 일 등 일생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일본 최고 의과대학에서 외과를 마치고 전임강사로 교수진에 있던 젊은 의사가 타국의 작은 병원에서 의학 강의를 시작한 것은 그의 의학과 교육에 대한 열정과 타고난 다정함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10여 점의 사진과 졸업앨범, 유학생활 때 보낸 엽서, 그리고 유족(며느리와 손녀들)이 기념행사 축의금을 안고 그가 배로 건넜을 현해탄을 알 수 없는 쓸쓸한 심정으로 넘어왔다.
김수용기자 ksy@msnet.co.kr
감수=의료사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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