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를 금지한 일본 '평화헌법'이 공포된 지 2년 뒤인 1949년 가을 일본 내 평화주의자들을 긴장시킨 보도가 흘러나왔다. 구 일본군 조종사 500명 정도가 연합국최고사령부(SCAP)의 '주선'으로 중국 본토 탈환을 준비 중이던 국민당 정권을 돕기 위해 용병으로 입대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시 맥아더 장군의 수석 첩보 담당관인 찰스 윌로비 장군은 공개적으로 이 보도가 어느 정도 사실일 수도 있다고 해 전쟁에 지친 일본인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6'25가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 정부 지도자들에게 30만∼35만 명 규모의 일본군을 서둘러 창설하라고 비밀리에 요청했다. 이에 대해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가 난색을 표하자 미국 국무장관 존 포스터 덜레스는 재무장을 촉구하기 위해 일본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다. 요시다가 미국의 요구를 거부한 표면적인 이유는 '재무장에 따른 경제적 압박' '일본 내 격렬한 반대' '아시아 국가의 반발' 등이었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미국이 새로 창설된 일본군을 한국전쟁에 참전하도록 압박할 것으로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일본이 재무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6'25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경찰예비대'란 이름으로 지상군을 창설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군대라는 인상을 지우기 위해 경찰예비대가 보유한 전차를 '특차'(特車)라고 이름 붙이는 등 갖가지 꼼수를 썼다. 경찰예비대란 명칭부터가 그런 꼼수의 소산이다. 그러나 누가 봐도 경찰예비대는 군대였다. 요시다 총리는 경찰예비대가 재무장이 아니라고 했지만, 1952년 2월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그 말을 믿는다는 응답은 12%에 불과했다.
이렇게 창설된 경찰예비대는 미군 장교들이 훈련시켰다. 그래서 조직과 장비도 우수했다. 초창기 경찰예비대의 훈련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한 미군 장교는 경찰예비대는 조직 면에서나 장비 면에서나 '미군의 축소판'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런 사실들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일본은 '평화헌법' 발효 직후부터 재무장을 추진해 왔으며 후원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일본에 전쟁 포기와 군대 보유 금지를 강제한 미국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미국이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을 승인, 재무장의 길을 열어준 것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과연 우리에게 미국은 어떤 존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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