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강성률의 줌인] 괴물을 두려워하다 스스로 괴물이 된 소년 '화이'

장준환 10년 만의 복귀작, 그 묵직함

# 다섯명의 아버지에 의해 길러진 소년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잔혹한 복수

# 사회와 단절된 기형적 인물들 이야기

장준환이 10년 만에 복귀했다. 그러니까 그가 '지구를 지켜라'로 데뷔해 '천재 감독'이라는 평가를 받은 것이 벌써 10년 전이라는 말이다. 그동안 그는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타짜2' 등을 비롯한 여러 영화를 준비했지만 번번이 완성하지는 못했다. 그간 그를 둘러싼 가장 큰 뉴스는, 그가 영화배우 문소리와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그가 느꼈을 고독과 처절한 고통을 나는 알지 못하지만, 10년 만에 완성한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이하 '화이')를 보면서 그의 실력은 여전하다는 것을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화이'는 그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이창동, 이준동 형제가 기획한 영화이다. 이것을 장준환은 자신의 영화로 만들었다. 이 말은 장준환이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거부했다는 말이 아니다. 장준환은 '화이'의 시나리오에 매료되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이야기가 그의 단편 '이매진'이나 장편 '지구를 지켜라'처럼 자신의 세계에 매몰된, 기형적이고 고통스러운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첫 장면에 등장한 것처럼, 그는 스스로 만들었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괴물과 함께 살고 있다. 어릴 적부터 그를 따라다닌 괴물. 은빛의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공포스러운 소리를 내며 그를 괴롭히는 그 괴물의 정체를 밝히는 것이 어쩌면 영화의 목표이다. 어떻게 화이는 괴물의 공포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더 근원적인 질문. 그 괴물은 왜 화이에게만 나타나는가? 괴물이 두려워 괴물로부터 도망가려 했던 화이는 결국 괴물을 삼켜 스스로 괴물이 되어버린다. 이 역설. 이것은 '지구라 지켜라'의 병구의 삶과도 일치한다. 괴물을 거부하려다 스스로 괴물이 되니 괴물의 환상이 보이지도 않고 괴물이 두렵지도 않지만, 그는 일상적인 생활을 이제는 할 수가 없다. 결국 사랑하는 소녀의 곁을 떠나야 한다.

흥미롭게도 화이라는 캐릭터에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강하게 녹아있다. 화이는 다섯 명의 아버지에 의해 길러진 소년이다. 여기서 다시 물어야 한다. 왜 아버지가 다섯이냐고? 진짜 아버지는 누구이고, 유사 아버지는 누구인지? 마지막으로 진짜 아버지와 유사 아버지의 관계는 어떤지도 물어야 한다. 똑같은 질문을 어머니에게도 해야 한다. 화이를 기른 어머니는 누구이고, 낳은 어머니는 누구인가? 이렇게 보면 영화는 진짜 아버지를 죽이도록 만든 유사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영화이고, 유사 아버지를 죽여 진짜 어머니와 기른 어머니를 보호하는 영화이다. 더 나아가면, 스스로 진짜 아버지를 살해한 아들의 이야기, 그래서 진짜 어머니를 죽이려는 유사 아버지까지 죽이려는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된다.

지독히도 신화적이고 정신분석학적인, 그래서 다소 진부하기까지 한 내용을 영화는 차분히 따라가면서 마지막에 가서야 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결말을 선사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모든 설정을 만든 사람의 죄의식이다. 화이를 그렇게 키운 사람의 그 깊은 절망과 죄의식. 그의 죄의식은 처음에는 구원을 향한 갈구로 나아갔고, 그런 갈구가 실패로 낙인 찍히면서 잔혹한 복수를, 자신에게 실패를 안겨줬다고 생각하는 신과, 그 신을 믿는 사람, 그 사람의 연인과, 이후 그의 아들에게까지 잔혹하게 거행한다.

이렇게 보면 '화이'는 박찬욱의 상상력과 B급 영화 스타일을 슬쩍 비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체 훼손의 잔혹한 장면이 여과 없이 등장하는 것도 박찬욱과 닮았고, 무엇보다 죄의식 때문에 잔혹한 복수를 하는 이유나 방법도 닮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화이'는 좀 더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라는 것이다. 그 스토리의 구성 속에 놓여, 철저하게 그 방식 안에서 작동한다는 것이다. 박찬욱의 영화는, 이것은 칭찬이기도 하고 비판이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웰메이드한 구성을 취하지는 않는다.

사실 '화이'의 매혹은 스토리의 매혹에 그치지 않는다. 가령, 다섯 명의 아버지가 왜 화이를 키우며 살아가는지 영화를 보며 크게 궁금하지 않다. 이 말을 다르게 하면, 장준환은 이 영화를 대중적인 장르의 규칙 안에서 만들려고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오히려 영화는 이런 내용을 장준환의 스타일로 만들어냈기 때문에 더 매혹적이었다. 아마도 장준환은 이 영화를 클래시컬하면서도 묵직한 영화로 만들려고 한 것 같다. 영화 곳곳에는 탁월하지는 않지만 비범한 감독이 연출한 것 같은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환상적이면서 동시에 현실적인 장면들이 수시로 결합하기도 한다. 괴물과 만나 괴물이 되어가는 화이의 모습, 그를 포용하는 암울하면서도 현실적인 미장센, 그 미장센을 담고 있는 유려한 카메라 테크닉, 이 요소들이 만나 때로는 처연하고 때로는 무거우며 또 때로는 수줍기까지 하다.

확실히 '화이'는 스토리의 힘보다는 스타일의 힘이 더 큰 영화이다. 뻔히 보이는 스토리를 뻔하게 만들지 않고 그 안에 장준환이라는 감독의 인장을 확실하게 찍으려 한 것 같다. 그런데 가끔씩, 그 사이에 보이는 괴리가 흥미로웠다. 아마 장준환은 이 영화를 만들면서 쾌락의 극단을 오갔을 것 같은데, 그것을 지켜보는 맛도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이래서 비평은 잔인한가 보다.

강성률<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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