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폐쇄회로 TV·지하주차장 비상벨…범죄예방 건축물 본격화

범죄자 나쁜 마음 사전에 싹 없앤다

대구시는 이달 4일 셉테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대구시는 이달 4일 셉테드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위해 '범죄예방 환경설계 도입과 공공디자인'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정운철기자

올 5월 대구지역 아파트 중 최초로 '북죽곡 한라비발디'가 '범죄예방 환경설계 인증'을 받았다. 조명과 폐쇄회로TV를 단지 곳곳에 설치하는 등 범죄 사각지대를 없애 한국셉테드학회의 인증을 얻었다. 설계계획을 보면 1, 2층과 최상층에 동체감지기를 설치해 침입자를 감지하고, 아파트 출입구는 경계지점의 바닥 높이를 다르게 하고 별도의 조명을 설치해 공간 구분을 확실히 해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다. 담장은 막힌 벽이 아닌 안과 밖이 보이게 나무를 심어 감시의 사각지대를 없앤다. 어린이 놀이터는 아파트 동과 동 사이 중앙에 있고, 지하주차장 기둥에 비상벨을 설치해 만약의 범죄에 대비한다. 무인택배 시스템을 도입해 범죄자의 침입을 사전에 막을 계획이다.

공'폐가와 원룸 밀집지역, 구도심의 골목길, 주차장과 놀이터 등 범죄에 취약한 도심 환경을 개선하는 방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범죄자에 대한 형사적인 처벌만으로는 범죄를 줄일 수 없다는 문제의식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범죄예방 환경설계', 일명 '셉테드'(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 Design)다. 대구시는 앞으로 자체 안전마을 만들기 사업을 진행하고, 건축심의 과정에 범죄를 막을 수 있는 환경디자인을 평가하는 등 셉테드 도입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범죄 취약 도심지역…셉테드 모색

대구시 곳곳엔 범죄 취약구역이 있다. 공'폐가와 원룸 밀집지역, 구도심의 외진 골목길, 공원, 아파트 단지 내 감시 사각지대, 주차장과 놀이터 등 일상 속 공간이 범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지난해 11월 가출한 A(19) 군은 올 3월 대구 동구 신암동의 한 빈집에서 생활하면서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에 인근 주차장에서 절도 범죄를 저질렀다. 주인이 버려두고 간 빈집을 본거지로 삼아 동네의 어둡고 구석진 곳에 세워둔 차의 유리문을 부수고 돈을 훔치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B(15) 군은 7월 31일 오후 11시 30분쯤 대구 동구 신서동 한 공원에서 술에 취해 벤치에서 잠든 40대 남성의 스마트폰을 훔쳤다. B군은 늦은 시간 인적이 드문 공원에서 범죄 대상을 물색해 범죄를 저질렀다. C(15) 군은 올 1월 18일 오후 7시 40분쯤 대구 달성군 한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13세 남자아이가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을 들고 달아났다가 검거됐다.

아파트 단지 안과 밖도 범죄에 취약하다. D(47) 씨는 올 4월 18일 대낮인 오전 11시 10분쯤 대구 동구 신천동 한 아파트 문을 도구로 연 뒤 50만원 상당의 금팔찌 1개를 가지고 나오는 등 7월까지 14차례에 걸쳐 모두 2천200여만원의 금품을 훔쳤다. D씨는 아파트 경비실에 있는 찾아가지 않은 택배 물품에서 동과 호수를 확인한 뒤 해당 빈집에 들어가 범행을 저질렀다. E(56) 씨는 올 2월 21일 자정쯤 수성구 범물동 아파트 단지 뒤편 도로에 주차해 놓은 4천만원 상당의 고급 승용차를 견인해 훔쳤다. E씨는 이 차의 번호판을 자신의 것으로 바꾼 뒤 팔려고 했다.

범죄예방 환경설계인 셉테드는 형사적 처벌만으로는 범죄를 줄일 수 없다는 문제인식에서 출발했다. 범죄가 발생한 뒤 경찰이 수사를 하고 범죄자를 검거하는 '사후 대처'보다 범죄를 유발하는 도시 내 공간의 디자인을 개선해 '사전 예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전 한국셉테드학회장인 이경훈 고려대 건축학과 교수는 "범죄는 비용과 편익을 계산하는 범죄자의 합리적인 판단을 통해 발생하기 때문에 범행 동기를 제공하는 장소의 디자인을 바꿈으로써 범죄율을 줄일 수 있다"며 "물리적인 환경을 개선하는 데 집중한 초기 셉테드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지역을 잘 아는 주민이 참여해 맞춤형 전략을 마련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내 도입 초기, 외국은 일반화 단계

이미 일반화된 외국의 셉테드 사례에서 범죄예방 효과가 확인되자 최근 국내에서 속속 도입을 서두르고 있다. 국토해양부는 올 1월 '건축물 범죄예방설계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 가이드라인은 최근 범죄가 자주 발생하거나 범죄 가능성이 높은 단독'공동주택과 문화'집회시설, 편의점, 고시원 등을 대상으로 했다. 범죄자가 쉽게 침입할 수 없도록 외부와 단절된 외벽이나 나무를 심는 등 건축물의 내'외부 설계기준을 제시했다. 경기도는 올 7월 셉테드 가이드라인을 도입해 공간별 디자인 매뉴얼과 범죄예방 체크리스트를 제시했다. 부산시도 올 7월 '범죄예방환경설계 가이드라인'을 마련, 주거단지의 신축과 주차장, 공원, 어린이 놀이터 등을 정비하는 경우 가이드라인을 적용하고, 부산시 도시디자인위원회의 심의기준으로 활용하고 있다.

외국에선 이미 셉테드가 일반화됐다. 영국은 1989년 셉테드를 정부의 범죄예방 전략 중 하나로 채택한 뒤 민생치안에 적용했다. 1998년 관련 법을 제정해 도시계획과 주택건설에 확대했다. 현재 범죄예방환경설계(SBD) 인증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은 지방정부 차원에서 조례로 셉테드를 적용하도록 제도화했다. 워싱턴 주의 시텍 시 경우 조례 규정을 통해 조명을 확충, 자연감시를 극대화했다. 텍사스 주 휴스턴은 여론조사를 해 폐가 정비, 가로등, 도로미화 등 지역주민들이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것부터 도시환경을 개선했다.

◆대구, 셉테드 도입 움직임 본격화

이런 분위기에 발맞춰 대구시는 4일 '범죄예방환경설계 도입과 공공디자인'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마련하는 등 셉테드 도입을 위한 본격적인 움직임에 나섰다. 이날 전문가들은 세미나를 통해 대구지역 특성에 맞는 다양한 셉테드 도입 방안을 제시했다.

최응렬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셉테드는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미 대구는 전국에서 최초로 담장허물기 사업을 시작하는 등 범죄예방환경설계를 실천해왔다"고 했다. 최 교수는 "앞으로 주민 참여 의지를 살리기 위해선 범죄 정보를 경찰만이 독점하지 말고 지역사회와 공유해야 한다"며 "이를 통해 범죄의 특성을 파악'진단한 뒤에야 지역 특성에 맞는 환경설계가 가능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미원 대구여성가족재단 대표는 "여성친화도시사업과 연계된 성범죄 예방대책을 추진해야 한다"며 "현재 대구에는 달서구와 중구, 수성구가 여성가족부의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됐는데, 이와 연계해 골목 등 후미진 곳에 폐쇄회로TV와 조명을 설치하는 등 안전 사각지대를 줄일 필요가 있다"고 했다.

대구시는 전문가들의 제안을 수용해 내년부터 도시계획과 건축물, 공공시설물 등에 셉테드를 공식 도입할 계획이다. 건축위원회에 범죄'보안 전문가를 참여하도록 해 아파트 단지 건축 심의 때 셉테드 심사를 강화한다. 이경배 대구시 안전총괄과장은 "정부의 안전마을 만들기 시범사업 선정에서 탈락했지만 내년에 자체 예산을 마련해 사업을 진행할 것"이라며 "앞으로 셉테드 도입을 위한 용역을 진행해 구체적인 환경설계 지침과 가이드라인을 수립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서광호기자 kozmo@msnet.co.kr

※키워드

셉테드(CPTED'Crime Prevention Through Environment Design)=건물, 공원, 가로 등 공간을 설계할 때부터 범죄 예방을 위한 다양한 수단을 먼저 적용하는 이론이다. 범죄에 취약한 도시환경의 감시'접근 통제 기능을 제고해 범법행위의 기회적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는 환경설계 시스템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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