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북으로 간 가수 김선초(하)

해방 후 좌파 연극 활동, 북한에서 남편에 의해 숙청

대중예술가 김선초의 출발이 배우였던 만큼 그녀의 음반 중에는 역시 연극, 영화와 관련된 것들이 많았습니다. 가극, 희극, 희가극, 화류애화, 아동비극, 아동비화가 각 1편씩이요, 오늘날의 개그나 만담, 코미디에 해당하는 난센스 장르가 11편입니다.

인기가수로서, 그리고 방송국 라디오 프로의 단골출연 등으로 대중적 인기가 한껏 높아진 김선초는 전국 어딜 가나 박수갈채와 환호를 받았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서 시에론 레코드사에서는 김선초 음반을 내고 싶은 욕심에 몰래 가수와 협약을 맺어 본명을 감추고 '미스. 조선'이란 예명으로 두 장의 앨범을 발매했었는데, 한 가수의 두 레코드사 동시발매를 둘러싸고 시에론 측과 콜럼비아간 심각한 분쟁까지 벌어진 적이 있었습니다.

최고 인기가수로서 명성이 높았던 1933년 10월 5일, 김선초는 서울 장곡천정 경성부 사회관에서 윤백남(尹白南'1888∼1954)의 주례로 당시 유명한 프로 문사이자 영화제작에 관계하던 서광제(徐光霽'1906∼?)와 결혼에 골인하게 됩니다.

이후 김선초는 각종 대표적인 음악회 공연과 경성방송국의 여러 라디오 프로, 이따금 펼쳐지는 극단의 연극공연, 영화 따위에 열정적이고도 화려한 출연을 계속 펼쳐갑니다. 1938년에는 영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 차홍녀, 황철, 김동규 등과 함께 출연해서 시어머니역을 맡았습니다. 홍도 역에는 그 유명한 차홍녀, 남편 역에는 김동규가 배정되었지요. 일제강점기말에는 국민연극경연대회, 전선(全鮮)가요무용경연대회, 조선연극협회 주최 연극경연대회, 군국영화 '조선해협'(朝鮮海峽) 출연 등으로 다수의 상을 받거나 군국체제를 위해 적극 활동하게 되는데, 이는 김선초의 생애에서 커다란 오점이자 얼룩이 되었습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김선초는 과거의 극단동료들과 함께 재빨리 조선연극동맹서울지부를 결성하고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남로당 결성을 축하하는 연극작품 '하곡'(夏穀, 함세덕 작'안일영 연출)을 공연하고, 문화공작단 간부로 충청남북도 일대를 순회하며 '태백산맥' '미스터 방' 등 좌파적 성향의 연극공연 활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이러한 공로로 김선초는 1948년 8월 25일 남한지역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대의원으로 선출됩니다. 그녀의 나이 불과 30대 후반의 일입니다. 남한에서 공산당활동이 금지되자 김선초는 1949년 이면상, 채규엽 등과 함께 38선을 넘어서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부부가 같이 월북했지만 북에서 두 사람의 운명은 갈라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월북 이후에도 김선초는 김일성정권 초기에 모범적 공산주의 연기자로서 열정적으로 활동했고, 북한의 인민들도 "영화는 문예봉(文藝峰), 무용은 최승희(崔承姬), 연극은 김선초"란 말을 즐겨 썼다고 합니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김선초는 점령지 서울에 인민군 복장으로 나타나 시공관에서 연극공연에 참가했습니다. 여기서 고향 후배이자 예술좌 동료였던 신카나리아를 만나 북으로 가자고 제의했지만 이를 거절한 신카나리아에게 혹독한 보복을 안겼습니다. 1950년대 중반, 김선초는 평양에서 기독교 감리교 계열의 목사였던 홍기주(洪箕疇)의 후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김선초 생애의 마지막 선택이었고 그것이 불행의 나락이었음을 누가 알았으리오. 홍기주는 이미 목사로서 김일성정권 수립을 위해 혈안이 된 사람이었는데, 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이라는 고위직까지 오른 그는 연안파를 몰아낼 때 남로당 계열로 월북해온 자신의 아내마저도 냉혹하게 숙청시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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