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양사 연금생활
나이 56세 되던 1934년 병세가 위독해진 심산은 다시 형집행 정지 처분을 받아 석방됐다. 대구의 병원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봄 부인이 식구들을 거느리고 대구 남산동으로 이사하여 가족과 함께 살게 됐다. 심산의 집은 왜경이 주야로 감시하는 통에 친척이나 친구들이 찾아올 수 없었다. 괜히 화를 부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1년여를 감옥 아닌 감옥에서 지내던 터에 감시하던 경찰들이 심산에게 조용한 곳에서 정양하라고 권했다. 병든 심산에 대한 감시가 완화된 것이다. 심산은 약을 사들고 울산에 있는 백양사로 갔다.
백양사 연금생활은 4년여나 이어졌다. 백양사 연금 당시의 심정을 담은 심산의 시가 있다. '나라 잃었으니 산들 무슨 낙이 있으며/ 집안 망했으니 죽으면 어디로 돌아갈까/ 무슨 낯으로 굶주리면 먹을 것을 찾고/ 무슨 심정으로 추우면 입을 것을 찾을까/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해/ 스스로 쓴웃음 짓다가 한숨짓노라.'
백양사 생활은 답답하고 괴로움만 준 것은 아니었다. 심산에게 건강을 돌려주었다. 정상적인 체력은 이미 불가능했지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력을 회복했다. 연금 생활 중 심산은 근 70여 편의 한시를 남겼다. 한시를 통해 자신의 심정을 표현하며 격앙된 심리도 차츰 안정됐다.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며 다가올 시간을 준비했다. 몸은 비록 갇혀 있지만 사유의 폭은 더없이 넓어진 것이다. 백양사 연금 생활은 독립 국가 건설에 대비할 시간을 심산에게 준 셈이다.
◆강화된 일제의 압박
심산이 투옥된 이후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에 대한 일제의 압박은 더욱 심해졌다. 1932년 1월 대한의 청년 이봉창이 일본 도쿄에서 만주국 황제 푸이와 관병식을 마치고 돌아가던 일왕 히로히토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일본제국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이 사건은 일본을 경악시키고 전 세계를 놀라게 했다. 석 달 뒤에는 윤봉길 의사가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기념식이 열린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졌다. 일본의 상해파견군 사령관과 일본 거류민단장이 죽고 일본함대사령관과 주중 일본공사 등이 부상을 입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거사는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대신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을 크게 호전시켰다. 국민당 정부 수반 장개석은 "중국의 100만 대군이 못하는 일을 한국의 젊은이들이 능히 하니 장하다"고 치하하는 한편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에 나섰다.
일본은 대규모 수사단을 상해로 파견해 임시정부 요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임시정부는 상해를 떠나야했다.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은 중국 전역을 전장터로 만들어 임시정부도 항주, 진강, 남경을 거쳐 장사, 광주, 류주, 중경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만주의 항일 무장단체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일본군에 짓밟혔다.
중일전쟁 후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일본에게 중국에서 군대를 철수시켜 만주사변 이전으로 돌아가라고 경고했다. 미일통상조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일본에 대한 철강과 석유 수출을 막았다. 철강과 석유 기계류 등을 미국에 의존하던 일본은 치명적 타격을 입었다. 1939년부터 경제상황도 극도로 악화됐다. 기초물자의 결핍이 심각해졌고 식량도 부족했다. 다급해진 일본은 조선과 대만에서 쌀을 무자비하게 공출했다. 그 결과 한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민족말살정책
일제의 식민지정책도 변화를 가져왔다. 한반도에서는 민족말살정책이 펼쳐졌다. 이른바 황국신민화정책이었다. 황국신민서사를 외우게 하고 궁성요배라 하여 매일 일왕의 궁성이 있는 곳을 향해 절하도록 강요했다. 한글 과목을 교과과정에서 폐지하고 한글 사용을 금지시켰다.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내세워 서울 남산을 비롯한 전국에 신사를 세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창씨개명이란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졌다. 일제의 만행이 극으로 치달으며 저항도 거세졌다. 전국의 감옥에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으려는 죄 없는 죄수들로 넘쳐났다.
심산의 백양사 연금 기간은 민족의 암흑기였다. 일제의 관리가 된 조선인들은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주린 배를 소나무 껍질이나 들판의 풀로 달래야 했다. 가만히 있는 일반인들도 굶주리는 판에 항일의 의지를 꺾지 않은 이들의 고통은 당연했다. 배가 고프다는 말만 해도 불온분자로 잡혀가는 판에 나라를 찾겠다고 나서는 이들을 일제가 가만둘 리 없었다.
◆동지들의 잇단 죽음
당연히 심산의 생활도 곤궁하고 고통스러웠다. 나라를 찾을 방법은 고사하고 내일의 희망조차 멀어져갔다. 그러나 조국 독립의 대의는 결코 꺾이지 않았다. 면회를 사절한다며 방문을 닫아걸었지만 그와 뜻을 같이하는 친지 동지들의 방문은 이어졌다. 만날 수 없으면 편지로 서로 마음을 전했다. 벽초 홍명희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시를 주고받으며 두터운 친분을 유지했다.
심산의 투옥 이후 많은 동지들이 죽음을 맞았다. 일송 김동삼이 죽었고 안창호도 세상을 떠났다. 백양사로 들어가기 직전에는 신채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심산은 단재와 북경에서 함께 잡지를 만들기도 했고 국내 모금을 위해 잠입할 때 단재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아들을 맡기기도 했었다. 그만큼 신채호는 심산에게 가장 가깝고도 소중한 동지였다.
나라를 찾겠다고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이역만리를 떠돌며 싸우던 동지들의 죽음은 심산을 암담하게 만들었지만 시간은 독립의 그날을 위해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애석하고 분통한 마음을 달래던 백양사 연금 생활은 5년 만에 끝났다. 일제의 감시가 다소 풀린 덕분이었다. 고향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결정이 났다. 고향에 돌아온 심산은 어머니의 산소로 가서 시묘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이었다. 심산의 어머니는 그가 상해로 망명한 다음해 세상을 떠났다. 심산은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한인 학생들의 뒷바라지에 동분서주하던 상해 시절 병상에서 만주일보 신문을 보고 알게 됐다. 귀국하면 당장 체포될 처지의 그가 할 수 있던 것은 이역만리 타향에서의 통곡뿐이었다. 독립자금 모금을 위해 잠입했을 때에도 일제의 감시 때문에 아예 산소를 찾아가지 못했던 심산은 어머니 사후 20년 만에 엎드려 불효를 빌었다.
서영관 객원기자 seotin1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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