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역사가 명(明)에 순종하는 역사였다면, 고려의 역사는 송(宋)에 맞서 대항하며 어깨를 쳐들고 으스대며 꼿꼿했던 역사였다. 그럼에도 기록과 문헌이 많지 않고 역사가 잘못 전해진다. 시조의 처음이 우탁이라고 하지만 그보다 280여 년 앞선 '해동공자' 최충의 시조 2수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14세기가 아닌 11세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음을 상기하며 최충의 시 한 수를 번안해 보았다.
뜰 가득 달빛 촛불 산빛 초대 없는 손님
소나무 현이 있어 악보 없이 연주하니
나 혼자 보배로 여길 뿐 전할 수는 없다네.
滿庭月色無烟燭 入座山光不速賓
만정월색무연촉 입좌산광불속빈
更有松絃彈譜外 只堪珍重未傳人
갱유송현탄보외 지감진중미전인
【한자와 어구】
滿庭: 정원에 가득하다/ 月色: 달빛/ 無烟燭: 연기 없는 촛불/ 入座: 자리에 들다/ 不速賓: 초대하지 않는 손님/ 更有: 다시 ~이 있다/ 松絃: 소나무 현/ 彈: 타다, 연주하다/ 譜外: 악보 밖, 곧 악보 없는 악보/ 只: 다만/ 堪珍: 보배로 여기다/ 重: 거듭/ 未傳人: 사람에게 전하지 못하다.
'보배로만 여길 뿐 사람에겐 전할 수 없네'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 성재(惺齋) 최충(崔沖'984~1068)은 해동공자로 불린다. 사학십이도인 문헌공도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학교 교육의 아버지로 그가 세운 9재학당은 사학 교육의 원조이자 고려시대 문신 배출의 산실이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뜰에 가득한 달빛은 연기 없는 촛불이요/ 자리에 드는 산 빛은 초대(招待)하지 않은 손님이네/ 다시 소나무 현이 있어 악보 밖의 곡을 연주하느니/ 다만 보배로이 여길 뿐 사람에겐 전할 순 없네'라고 번역된다.
고려 역사를 아는 사람이라면, 최충이란 이름은 그리 생소하지 않다. 최승로가 유교적 정치 개혁에 공헌한 인물이라면, 최충은 유교 교육을 제대로 받은 인물을 배출하는 데 이바지한 인물이라 평가된다. 실제 유교 경전에 바탕을 둔 그의 학문 교육은 유학이 꽃피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사학 교육의 아버지다.
최충의 문장은 시구 몇 절과 약간의 금석문자가 전해질 뿐이다. 무인의 난으로 문신이 살해되고 그들의 문집도 불태워질 때 함께 없어진 탓이라 한다. 지금 볼 수 있는 것은 원주 거돈사의 비문(碑文)과 직산 홍경사의 갈기(碣記)가 남아 있을 뿐이다.
화자는 자연을 기묘하게 표현하는 재주와 시심을 부린다. 달빛은 연기 없는 촛불이요, 산 빛은 초대하지 않는 손님이라고 표현하면서, 소나무 '현'이 악보를 연주하고 있다고 표현한다. 이와 같은 자연의 아름다움과 자연이 주는 메시지를 어찌 사람에게만 다 전달할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데서 묘미를 찾는다.
최충은 고려의 문신으로, 문장과 글씨에 능해 해동공자로 불렸다. 시호는 문헌(文憲). 1005년 문과에 장원, 1013년 국사수찬관 때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칠대실록'(七代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37년 참지정사국사수찬관 때는 '현종실록'(顯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1041년 서북로병마판사로 나가 영원(寧遠)'평로(平虜)에 진을 치고, 산성 개수(改修)를 감독했다. 1047년 문하시중으로서 법률관들에게 율령을 가르쳐 고려 형법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1050년 서북면도병마사 때 농번기의 공역(工役) 금지와 국가 재정의 낭비를 막도록 상소하여 시행했고, 동여진(東女眞)의 동태를 파악, 국방을 강화하는 등 업적을 쌓았다.
벼슬에서 물러나 송악산 아래에 사숙을 열고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이를 문헌공도(文憲公徒)라고 했는데, 12공도(公徒) 중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정종의 묘정(廟庭)에, 후에 선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해주 문헌서원(文憲書院)에 제향되었다. '귀법사제영석각'(歸法寺題詠石刻'개성), '거돈사원공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원주), '홍경사개창비'(弘慶寺開創碑'직산) 등의 글씨가 남아 있고, 저서에 '최문헌공유고'(崔文憲公遺稿)가 있다.
장희구(한국한문교육연구원 이사장'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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