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순의 가요 이야기] 일탈 꿈꾸었던 가수 박단마(상)

자유분방하며 은근슬쩍 밀고 당기는 창법으로 주목

여러분께서는 '세월아 네월아'라든가 '아이고나 요 맹꽁''나는 열일곱살' '날라리 바람' 따위의 옛 노래를 들어보신 기억이 나실 테지요? 바로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박단마(朴丹馬'1921∼92)라는 이름의 여성이었다는 사실도 혹시 아시는지요? 어린 시절 라디오를 통해 듣던 이 박단마의 노래들은 동시대의 다른 노래들에 비해 유난히 리듬이나 템포가 흥겹고 자유분방하며 은근슬쩍 밀고 당기는 창법이 참 독특하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세월이 한참이나 흘러서 음악에 대한 지식을 조금 알게 된 지금 이 노래들을 다시 곰곰이 들어보니 참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이 거기에 깃들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무엇이냐고요? 그것은 바로 미국 재즈음악의 특징인 래그타임(ragtime), 즉 약박에서 당김음을 재치 있게 활용하는 창법과 스윙(swing)이 지니고 있는 동적, 리듬적인 분위기가 가수 박단마의 창법 속에 진작 강하게 쓰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걸쳐 재즈는 본격적인 음악으로 미국 서민들의 삶속에서 당당한 위상을 확보하게 되는데, 박단마는 1934년 빅타레코드사를 통해 신진가수로 데뷔했으면서도 재즈음악의 창법이 지니고 있는 여러 요소들을 자신의 가창에 적극 활용해서 가수로서의 면모를 부각시키고 있었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이것은 박단마가 미국 음악의 새롭고 첨단적인 흐름인 재즈에 대해서 익숙해 있었다기보다도 박단마의 창법 자체가 지니는 여러 다채롭고 자유분방한 요소들이 재즈음악의 특성과 절묘하게 부합되었다는 해석이 더욱 타당할 것 같습니다.

박단마는 1921년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린 시절 가계에 관한 구체적 자료는 확인할 길 없습니다만 극작가 이서구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유년시절부터 연극무대에 섰었고, 또 권번의 기생으로 일하는 언니가 한 번씩 집에 돌아와 조용한 시간에 노래를 부르면 그 모습이 너무 좋아서 어깨너머로 흉내를 내었다고 합니다. 박단마의 나이 불과 13세에 박영호 원작으로 이원용이 감독을 맡았던 영화 '고향'에 아역배우로 출연했었다는 기록을 보면 일찍부터 대중예술가로서의 끼가 왕성했다는 사실을 추정하게 합니다. 같은 해 여름, 경성방송국(JODK)에 초청을 받아 '봄 맞는 꾀꼬리' '거지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박단마는 16세가 되던 1937년 6월, 드디어 빅타레코드사에서 '상사 구백리' '날 두고 진정 참말' 등 두 곡이 담긴 음반으로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습니다. 요즘말로 가히 천재소녀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17세에 경성방송국 라디오 제2방송에 표봉천과 함께 출연해서 '상사 구백리' 등을 불렀고, 19세가 되던 1940년 3월에는 김용환이 주재하는 반도악극좌(半島樂劇座) 연기부에 멤버로 참가해서 북조선순회공연, 서울공연, 북지황군위문공연 등을 다녀왔습니다.

박단마의 나이 22세가 되던 해인 1943년 2월 제일악극대에서 징병제 진전을 위한 악극 '바라와 기(旗)'를 공연할 때 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모든 것이 일본의 패망을 향해 치달아가던 1943년, 박단마는 중국 천진에서 한국인 김정남이 운영하는 악극단 '신태양'에 들어가 손목인, 황해, 심연, 신카나리아, 오인애(무용) 등과 함께 멤버로 활동합니다. 그리고 1944년 2월 12일부터 10일 동안 매일신보와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전국의 군수공장 위문격려대의 일원으로 서울, 인천 등지를 다녀왔는데, 이때의 멤버들은 손목인, 박단마 등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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