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영글어 가고 있다. 그렇지만 왠지 허허롭다. 낙엽 지는 가로수 길도 걷고 싶고 짙은 커피향도 맡고 싶다. 때론 신명나게 한번 놀아보고도 싶다. 그렇다면 대구 남구 대명도 일대 '물베기 마을'이 딱이다. 오래전 그곳으로 기억하거나 '거기에 가서 뭐해'라는 의문을 갖고 있다면 일단 한번 가볼 일이다.
물베기 마을이 요즘 대구에서 가장 '핫'(hot)한 장소로 떠오르고 있다. 물베기는 대구 남구 대명2동 1823번지 주변의 옛 자연부락 명칭이다. 과거부터 음악, 미술, 무용 등 문화예술인들의 활동 구역이었던 이 일대가 최근 개인 연습실이 활성화되고 카페, 음식점들이 늘어나면서 문화예술이 흐르는 젊은 거리로 급부상했다.
◆음악과 커피향이 흐른다
16일 오후 찾은 '대구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 경북여자정보고등학교 뒷길. 물베기 마을의 중심거리다. 명덕네거리 입구부터 '쿵더쿵 쿵덕' 묵직한 국악기 소리가 거리 전체에 울린다. 절로 어깨가 들썩인다. 길을 걷다 보니 국악연습실, 음악연습실 등 음악학원이라는 간판이 여기저기 보인다. 경북예술고등학교가 인근에 있어 과거에도 개인 레슨을 위한 연습실이 여럿 있었지만 최근 그 수가 급격히 늘었다. 교수나 강사들이 사용하는 연습실 외에 대학생, 심지어 고등학생들이 입시 준비를 위해 사용하는 개인 연습실도 많이 생겼다.
한 음악연습실 직원은 "대학생이나 고교생들은 물론 음악과 미술 하는 사람들이 이 일대에 개인 연습실을 마련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또 과거 지하공간에 자리했던 연습실이 지상으로 올라왔다. 인근 부동산공인중개사무소에 따르면 연습실을 구하는 문의 전화가 자주 온다고 한다. 연습실과 함께 건물 1층에는 커피숍과 음식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감미로운 커피향이 거리 전체에 퍼져 있다. 눈과 귀는 물론 코까지 즐거워진다.
이 골목이 본격적으로 변신한 것은 카페와 맛집이 들어서면서부터다. 불과 2년 사이에 30여 곳의 카페와 음식점이 새로 들어섰다. 자세히 보니 카페 등에는 공연을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이 일대에서 각종 공연에 대한 홍보도 이뤄지고 있는 셈이었다. 카페 '구움' 직원은 "이곳을 찾는 문화예술인들이 많다 보니 공연 포스터를 붙이면 자연스럽게 홍보가 된다. 카페에도 도움이 되고 홍보도 할 수 있어 서로 윈윈이 된다"고 했다.
젊은 층 유동인구가 늘면서 해가 지면 한적해지던 이 골목이 늦은 밤까지 화사한 빛을 밝히게 됐다. 이 지역 한 편의점 주인은 "2년 전 처음 입점했을 때에는 야간에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해 매출이 2배 가까이 늘었다"고 했다.
문화예술, 음식 등 각 분야의 스펙트럼도 다양하다. 떡볶이부터 이탈리아 음식점, 최고급 한정식 등을 입맛대로 고를 수 있다. 특징 있는 카페도 즐비하다. 전문적인 커피나 차를 마실 수 있는 곳도 생겼다. 또 국악부터 실용음악, 고전과 현대미술이 공존하고 있다. 핸드메이드 커피를 대량 공급하고 있는 '카페 놀이터' 주인 최정훈 씨는 "손님 대부분이 문화예술인이다 보니 원두나 핸드드립커피 등 차별화된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손님들이 커피원료를 대량 주문할 경우 원가 수준에 팔고 있다"고 했다.
◆문화예술 축제
이곳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 차원을 넘어섰다. 문화예술을 생산하는 공장이다. 자연스레 정보 교류 등을 통해 시너지를 높이고 있다. 대구에서 활동하는 음악인의 60%가 이곳에서 활동하고 있다.
음악연습으로 인한 소음 민원도 사라졌다. 한 음악학원 원장은 "다른 지역 같으면 연주를 하면 시끄럽다고 난리지만 여기에는 창문을 열어놓고 연주를 해도 주위에서 뭐라고 하는 곳이 없다. 그만큼 문화예술인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다"고 했다.
거리 곳곳에서 음악회 등 문화행사가 열린다. 이달 25일부터 이틀간 청소년문화예술거리(경북여자정보고 북편 도로)에서 '물베기 마을 문화예술축제'가 열린다. 올해 네 번째인 이 축제에는 매년 2천 명 이상이 참여한다. 현대음악오케스트라, 싱싱음악대, 물베기 주민합창단, 마스카라 여성밴드, 춤의 나라 예술단이 공연을 하고 주민노래자랑도 열린다. 특히 지역 청소년들이 펼치는 록밴드'댄스 공연, 인형극도 선보인다. 지역 내 학교, 단체, 상가별로 부스도 마련된다. 물베기축제추진위원회가 '물베기 예술마을'이라는 소식지를 처음 발간해 주민들에게 무료로 배부했다. 2010년 1회 때부터 축제를 추진해왔던 김진수 물베기 예술마을 마을지기는 "마을 주변에 고교와 대학이 있고 음악, 미술, 사진, 무용 등 예술 관련 학원과 점포가 400여 곳이나 밀집해 주민들이 모두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축제를 만들어보자고 했던 것이 이렇게 발전했다. 이 같은 노력 덕에 5년 전 단순한 행정구역에 불과했던 이곳이 '우리 마을'이라는 공동체로 발전했다"고 했다.
앞서 지난 7월과 이달 11일에는 '물베기 마을 작은음악회'가 대명2동 주민센터 앞 대명어린이공원에서 열렸다. 대구시립예술단의 찾아가는 음악회가 제공한 이번 공연은 인근 지역 주민들까지 참석하는 등 호응을 얻었다. 또 정기적으로 마을 영화제, 하우스 음악제 등도 열린다. 제1회 물베기 축제 때부터 참여 중인 최홍기 현대음악오케스트라 지휘자는 매달 28일. 오후 2시 28분 명덕네거리에서 2'28학생의거를 기념해 2분 18초간 깜짝 공연을 하고 있다.
이철순 축제추진위원은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이나 문화예술인들이 자신들의 재능을 축제를 통해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꾸준히 마련할 예정이다. 이벤트성 축제가 아닌 주민이 즐기고 주도하는 축제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문화예술의 샛별
이 지역은 앞으로 더 젊어지고 밝아질 전망이다. 문화예술 생각대로 조성, 앞산맛둘레길 등 다양한 사업이 추진되면서 시너지 효과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남구청이 추진하고 있는 문화예술 생각대로(명덕네거리~영대병원네거리 1.3㎞ 구간) 조성사업은 물베기 마을에 큰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물베기 마을을 비롯해 생각대로 주변의 삭막했던 옹벽들이 명품디자인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경북여자정보고 북편도로 등은 청소년 블루존으로 거듭난다. 이미 이달 초 이면도로 사업이 완료됐다. '물베기 한정식 사거리' '불교회관 사거리' 등의 거리는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인조 화강블록으로 교체됐다. 내년 3월부터 10월까지는 경북여자정보고 북편 도로에서 도로 정비가 이뤄진다.
또 청소년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청소년창작센터가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청소년 문화거리 조성에 앞서 청소년들의 의견을 듣고 반영하기 위하여 인근 중'고교 학생 50여 명이 주 1회 5주간 참여하여 '청소년 디자인 학교'를 진행했다.
임병헌 남구청장은 "문화예술 생각대로 사업이 주민들의 참여 속에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고 윤곽을 드러내고 있는 곳마다 많은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청소년들에게는 꿈과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시민들에게는 문화와 예술의 향취를 즐길 수 있는 전국의 문화예술 명소로 만들겠다"고 했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물베기 마을=대구 남구 대명2동의 자연부락. 지금의 경북예술고, 경북여자정보고, 대구교대 등이 있는 자리로 옛날에는 암석투성이의 산등성이였다. 인근 영선못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곳으로 흘러 수로가 되었다. 작은 등성이는 당시 새못안 동네의 뒷산으로 불린 야산이었다. 이 부근에 촌락이 생겨 영선못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수로를 만들었다는 뜻에서 '물배길' '물베기'라는 부락명이 생기고 참나무가 많아 '참나무 물베기'라고도 불렸다.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대구의 대표적인 부촌(富村)이었다. 영선못이 매립되면서 주택단지가 들어서고 중앙대로가 확장되면서 개발이 진행됐다. 물베기 마을이라는 명칭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에 잊혔다. 2010년 주민들이 마을 축제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마을의 옛 이름을 찾아 축제 이름에 활용하자는 생각에 축제 이름을 '물베기 마을 문화예술 축제'로 이름 지으면서 옛 이름을 찾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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