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엄마 걱정-기형도(1960∼1989)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91)

그렇게 고통스럽고 슬프던 날도 세월이 한참 흘러 돌아보면 그리운가 보다. 시장에 가서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는 배고프고 외롭기만 하던 어린 시절을 돌아보는 시선이 이렇게 다정해도 되는가. 눈물겹다. 아버지도 없고 형제들도 돈 벌러 다른 데로 가버린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소년은 오직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혼자 있어도 아랫목을 비워두는 마음을 누구라도 훔쳐본다면 다독여주고 싶으리라. 시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아이를 어떻게 보듬었을지 보지 않아도 알 듯하다. 아이가 기다린 것은 밥이 아니라 품이었으리라.

현대는 대가족이 해체되고 소가족마저 무너지기 일쑤다. 밥을 나누는 것도 아름답지만 품을 나누는 것이 아쉬운 시절이다. 홀몸노인이니 소년가장이니 굳이 들먹거리지 않아도 우리 주변에는 여러 가지 불안한 가정환경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다. 거의 고령들만 사는 농촌의 집집은 또 어떤가.

가장 아름다운 시는 동시 같은 시라고 했던가. 이 시는 그로테스크한 시를 많이 남긴 기형도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동시에 가까운 서정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인생의 책갈피에 누구나 간직하고 있음 직한 아름다운 삽화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