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풍경의 안쪽에서 말들이 돋아나기를 바랐는데, 풍경은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풍경은 태어나지 않은 말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적막강산이었다.(김훈의 '내 젊은 날의 숲'의 '작가의 말' 중에서)
사무실 창으로 바라보는 풍경은 대체로 고요하다. 이따금 분주한 목소리들이 방문하기는 하지만 멀리 보이는 앞산에 비안개라도 가득하면 일손을 놓고 지켜볼 때가 많다. 분명 저 풍경 안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의 숨소리로 가득할 텐데 그것이 말로 돋아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로 인해 삶의 절박함을 잠시 잊고 나만의 숨소리에 갇혀 하루를 보내는 일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잡는 것이 대체로 김훈의 책인 경우가 많았다.
이번에 다시 김훈의 책을 받았지만 마지막 문장에 도달하기 위해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책을 펴고 한 줄을 읽어 내려가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몰입도 되지 않았고, 생각이 이어지지도 않았다. 당연히 낙서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여기를 잡으면 저기가 멀어졌고, 꼬리를 만지면 머리가 멀리 사라졌다. 답답했다. 스스로 희망을 말했다고 했지만 한 자락의 희망도 잡히지 않았다. 내 현실의 절박함이 그가 말한 희망을 멀리했다. 아무리 내가 지닌 말로 그가 그린 풍경 속으로 들어가려 애를 썼지만 결국 나는 그의 속살로는 다가가지 못했다.
김훈의 글은 언제나 절박했다. 그의 글은 언제나 무너지는 담벼락 아래에 서 있는 형국이다.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나도 줄곧 절박했다. 절박한 삶을 읽으면서 내 절박함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반복되는 절박함으로 인해 오히려 나는 김훈의 글을 사랑했다. 새 책이 나오면 하룻밤에 마지막 문장까지 마침표를 찍는 것이 당연했다. 알고 보면 삶은 늘 절박했다. 그럴 때마다 답답하고 팍팍한 세상의 풍경을 거부하고 일이란 놈과 씨름했다. 그런데 그 일이란 놈이 내가 선택한 부분보다는 선택당한 부분이 많아 오히려 절박함은 심해졌다. 세상의 풍경은 해 질 무렵까지도 변함이 없이 답답했고 자라지 않는 희망으로 인해 나는 언제나 적막강산이었다.
사람 사는 풍경은 언제나 절망과 희망의 교차로에 서 있는 것이지만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의 풍경은 절망밖에 없었다. 나무도, 숲도 보이지 않았고, 젊은 날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 풍경은 언제나 쓸쓸했다. 세상 풍경을 바라보는 내 시선도 쓸쓸했다. 돌아서서 편안하게 내 속살의 풍경을 들여다볼 내 안의 시선이 없음, 그것이 다시 쓸쓸했다. 모든 시선은 어딘가로 향한다. 시선이 시선으로만 존재할 때 한없이 쓸쓸하다. 마음이 담기지 못한 시선의 한쪽에는 늘 불안한 세상 풍경이 흔들렸다. 나는 눈이 아프도록 세상을 들여다보았지만 그 속살을 진정으로 알 수 없었다.
2013년 여름은 더위가 길었다. 나는 늘 가까운 풍경에만 머물렀다. 새로운 풍경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싶었으나 가까운 풍경이 길을 가득 메우면서 새로운 풍경을 막았다. 풍경을 만나고 그 풍경으로 풍경을 그리는 김훈의 글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2013년 가을에 한준희 쓰다.' 쓰다 만 파일들의 마지막에 이렇게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제대로 정리하면 몇 권은 됨직한 생각의 파일들이 주인을 원망하고 있었다.
이전에는 '삭제할 수 없는 파일입니다'라는 모니터의 글자로 당혹스러울 때가 많았다. 열리지도 않고, 더구나 삭제할 수도 없는 파일들로 인해 힘들었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드는데 시선에 담기는 가을 하늘이 구름 한 점 없이 파랬다. 교육이 만들어가는 풍경도 저랬으면. 아이들의 미래를 진정으로 걱정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담은 정책이 교육정책에 더 많이 담길 수 있다면. 이번 가을에는 여기저기 흩어진 내 생각의 파일 끝에 '2013년 가을에 한준희 쓰다'라고 마침표를 찍고 싶다.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
"TK신공항, 전북 전주에 밀렸다"…국토위 파행, 여야 대치에 '영호남' 소환
헌재, 감사원장·검사 탄핵 '전원일치' 기각…尹 사건 가늠자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