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決心-정병근(1962∼)

깎아지른 절벽 하나를 세워야 한다

날카로운 그믐달 하나를 새벽하늘에 걸어야 한다

저 서릿발 고스란히 견디는 검은 나무

일억 년쯤 그 자리 지키는 바위의 침묵

내 목숨으로는 결코 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저 편이 분명 있어야 한다

-시집 『오래 전에 죽은 적이 있다』

(천년의 시작, 2002)

시는 아름다운 어떤 것이 들어 있어야 생명력을 지닌다. 그것이 겉으로 드러날 수도 있고, 꼭꼭 숨어 있을 수도 있다. 나는 이 둘을 다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속내로는 숨어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 시를 더 사랑한다. 웃을지도 모르지만, 외모가 아름다운 여인보다는 속정이 깊은 여인을 더 사랑한다고 하면 예가 될까.

이 시도 결코 겉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어서 취향에 맞다. 메마르고 각박하여 음산하고 괴이하기 짝이 없다. 한 마리 외로운 짐승이 백척간두에 서서 울부짖는 듯하다. 여기, 무슨 아름다움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곰곰 시를 곱씹다 보면 인간의 다디단 눈물의 맛이 나기도 하고, 지금 괴로운 현실에서 언젠가 아름다운 그곳으로 가야겠다는 꿈의 향기가 감돌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아득한 저편, 그것은 이미 잃어버린 아름다운 기억의 복원일 수도 있고, 아직 만나지 못한 극한의 아름다움이 살아 숨 쉬는 내일일 수도 있다. 지금 여기에는 없는 아름다운 인간과 삶의 원형질을 그리워하고 기다리는 눈 맑은 희망이 숨어 있는 민얼굴의 시다. 가슴이 저며진다는 것은 이 시와 같을 것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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