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금주의 정치 이슈] 한국사 교과서 수정 논란

좌·우로 나뉜 '역사 논쟁'…국정 교과서로 돌라갈라

교과서는 우리에게 편향 없는 정보, 변함없는 원칙, 기억해야 할 역사가 된다. 교과서는 '정확한 모든 것'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지금 '교과서 논쟁'이란 낯뜨거운 정쟁(政爭)으로 얼룩지고 있다. 교육부가 고교 한국사 교과서 8종 모두에 대해 829곳을 수정, 보완하라고 권고했다. 정치권에선 우편향이니 좌편향이니 하며 치받고 있다. 학생들은 혼란스럽다.

◆어떤 내용이 문제인가

지난 8월 검정심사에 합격한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출판사 8곳 모두에 대해 교육부는 수정'보완을 21일 권고했다. 지나고 나서 보니 "객관적 사실이 잘못 적시돼 있고, 표기와 표현에 오류가 있으며, 불균형한 서술에다 국가 정체성을 왜곡하는 내용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출판사가 교육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교육부는 수정 명령권을 행사한다고 경고했다. 그 사이 정치권에선 한국사 교과서의 좌'우편향 논란을 정쟁 이슈로 삼았다. 출판사별 수정'보완 권고는 ▷교학사(251건) ▷리베르(112건) ▷천재교육(107건) ▷두산동아(84건) ▷비상교육(80건) ▷금성출판사(69건) ▷지학사(64건) ▷미래엔(62건) 순이었다.

교육부는 8종 모두에 대해 "일본군 위안부가 1944년부터 동원된 것으로 오해할 수 있는 표현이 있다" "광복 이후 정부수립 과정을 미소공동위원회 개최, 이승만의 정읍 발언, 남북협상 추진, 5'10 총선거 순으로 배치해 남북분단 책임이 남한에 있는 것으로 오인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또 북한의 토지개혁에 대해선 6종에 대해 "북한은 농민에게 경작권만 지급했다. 분배방식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수정을 요했다.

이 밖에도 일제식민지, 정부수립, 남북대립, 북한, 민주화 운동, 영토표기, 경제발전, 베트남 파병, 제주 4'3사건, 개화기 등 근현대사 대부분에 오류가 있음을 알렸다.

◆집필진, "받아들일 수 없다"

교육부는 9월 초 전문직 공무원과 일선 역사교사 등 25명으로 구성된 태크스포스(TF)를 구성, 교과서 8종을 재분석했다. 별도로 교수, 역사교육 전공자 12명으로 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자문까지 받았다.

하지만 자체 수정안을 내놓겠다는 교학사를 뺀 7종 교과서 집필진이 교육부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31일 자체 수정안을 내놓겠다고 한다. 고교 한국사 교과서 집필진 협의회는 "교육부의 수정'권고안이 편파적이고, 전문가 자문위원회의 전문성도 의심스럽다"고 밝혔다. 명백한 표현상의 잘못이나 객관적 오류는 자체적으로 수정하겠다고는 하지만 내용에 대해선 교육부와 집필진이 치킨게임 양상이다.

교육부는 권고를 따르지 않으면 '교과용 도서에 관한 규정'에 따라 수정 명령을 내리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검정 교과서로 다시 돌아가나

한국사 교과서 논란이 정치권의 이념 갈등까지 부르자 "이참에 역사 과목을 국정교과서로 되돌리자"는 주장이 나온다. 정부'전문기관이 교과서 집필을 맡으면 오류도, 혼란도, 논란도 줄어들 것이란 이야기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한국사가 달라진다는 의혹도 없앨 수 있다는 논리를 들고 있다.

이에 대해선 14일 국회 국정감사장에 나온 서남수 교육부 장관이 "검'인정 교과서를 국정으로 하는 문제는 장단점이 있어 쉽지 않지만 심도 있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피력했다. '국정 교과서로의 회귀'도 불가능하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외국의 교과서 제도는

우리나라는 초'중'고교 등 학교급과 교과목에 따라 국정'검정'인정 교과서를 혼용해 쓰고 있다.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는 민간 출판사가 발행한 교과용 도서를 학교와 교사가 자유롭게 채택해 쓰고 있다. 독일과 이스라엘은 민간이 발행하려는 교과서를 사전 심의해 합격 여부를 가리는 검정제를 채택하고 있다. 반면 캐나다나 이탈리아는 민간이 이미 발행한 도서를 심의를 통해 교과서로 쓰는 인정제다. 북한, 베트남, 필리핀은 국가가 저작한 교과서 외엔 인정하지 않는 국정제다.

우리나라는 국정교과서가 중심이었다가 민주화 이후 검'인정제를 확대했다. 국정교과서제도가 위헌은 아니나 바람직한 제도도 아니라는 1992년 헌법재판소의 견해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서상현기자 subo80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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