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미군정 들어서자 애국자도 친일파도 서울로…서울로…

조선 오백년간 수십만 명에 불과하던 서울 인구는 일제 식민지 시절을 거쳐 해방 후 급격히 늘어났다. 미군이 들어오고 서울이 해방 정국의 중심이 되면서 서울 인구는 더욱 늘어났다. 해방 후 서울로 유입된 사람들은 다양했다. 아직 산업화 이전이라 서울이라고 일자리가 많은 곳은 아니었지만 미군정과 거래하려는 상인들은 너나없이 서울행 기차를 탔다. 해방 정국의 와중에 정치를 지망하던 사람들은 당연히 서울로 갔다. 지방에서 친일 등의 이유로 쫓겨 올려온 사람들에게 서울은 안성맞춤의 피난처였다. 일제치하 지방에서 숨어 지내던 공산주의자들도 너나없이 서울로 몰려갔다. 해외로 나갔다가 귀환한 사람들도 적잖았다.

사람들이 넘쳐나면서 애국자들도 부지기수였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활개 치던 친일 매국노들은 말끔히 사라졌다. 앞장섰든 숨어서 했든 저마다 독립운동에 나선 사람들뿐이었다. 부자들은 당연히 독립자금을 댔다고 나섰다. 일제치하 경찰이나 각급 기관에서 근무했던 사람들도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단체와 인연이 없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해방 후 몇 달 만에 미군정청에 등록된 정당과 단체는 수백 개가 넘었다. 날이 새면 새로운 정당과 단체들이 무더기로 생겨났다. 귀국한 이승만을 만나려고 급조된 단체도 수백 개가 넘었다. 사람들이 서울로 몰려들고 이승만이 조건 없는 단결을 주장하며 친일파 부자들을 끌어안자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은 '서울은 친일 반역자들의 피난처'라고까지 비난했다. 당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은 서울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고 나섰다.

심산은 끼리끼리 작당하고 분열하는 사람들과 세태를 경계했다. 분열과 난립이 민족의 화합이나 장차 통일된 조국 건설에 해가 될 뿐이라고 여긴 때문이다. 외세의 힘에 기대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도 마뜩잖았다. 사상과 이념으로 갈린 채 권력에 눈이 먼 사람들이 활개 치는 서울에서 심산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정당을 외면하고 권력에 초연한 심산의 마음을 친구나 동지들도 제대로 알아주지 못했다. 서울로 올라 간 심산이 몇 달 안 돼 병석에 드러눕고 만 것은 이 때문이었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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