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schung sun Kim'. 명함에 적힌 이름 표기가 낯설다. 어떻게 읽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직함도 생소하기는 마찬가지다. '한국문화정보학과 교수'는 무슨 내용을 가르칠까 하는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쓴 책들을 읽다 보면 동서고금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지적 방랑에 충격을 받기 마련이다. 가수 싸이의 노랫말처럼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사나이' 김중순(59) 계명대 교수를 만났다.
◆대구를 한국학의 중심으로
계명대는 한국문화정보학과를 2002년 신설했다. 우리 언어'문화의 세계화 및 산업화를 위한 전문인력을 양성하겠다는 목표에서다. 무형 자료인 신화'전설'민담들과 유형 자료인 문화재'유물을 산업콘텐츠화하고, 다문화'세계화시대에 발맞춰 외국어로서의 한국어를 제대로 가르칠 전문가를 길러내자는 것이다.
이 같은 취지처럼 학생들의 국적도 글로벌하다. 중국'베트남'태국'타지키스탄 등에서 온 외국인 학생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 된다. 이들은 한국 학생들과 함께 해외에 한국어 교사로 파견나가거나 문화재단'박물관에서 인턴십 과정을 거친다. 졸업 후에는 한국어 교원자격증(2급)도 받는다. 말 그대로 한국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알리는 문화 전문가가 되는 셈이다.
국내 최초의 한류(韓流) 전문 학과라 할 수 있는 이 학과의 설립은 김 교수의 '고집'이 뒷받침됐다. "1990년대 말부터 일기 시작한 한국 대중문화 열풍에 이론적 토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근거를 찾는 연구를 게을리하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날 수도 있기 때문이죠. 외국에 한국어 강좌가 있는 대학이 100곳이 넘지만 한국 문화를 가르치는 곳은 아직 일부에 불과한 실정입니다. 한국학을 민속학과 동일시하는 일부의 오류도 바로잡고 싶었습니다. 학생들이 한국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매년 교수들이 '오디세이아 코리아나 장학금'을 거둬 해외문화 탐방을 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10여 년 전 홀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김 교수는 그에 앞서 계명대 한국학연구원이 펴내는 한국학 전문 영문 학술지 '악타 코리아나'(Acta Koreana)의 초대 편집장을 맡아 오랫동안 지내기도 했다. '악타'는 기록이란 뜻의 라틴어다. 이 저널은 지난해 세계적 권위의 국제 인용색인인 'A & HCI'(Arts & Humanities Citation Index), 'SCOPUS'에 등재되는 쾌거를 이뤘다. 이들 인용색인 두 곳에 모두 등재된 국내 저널은 4종뿐이다.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악타 코리아나'의 창간을 준비했습니다. 당시만 하더라도 한국학을 전공하는 해외 학자들이 논문을 게재할 저널이 정작 한국에는 없었거든요. '변방이 계속 변방에 그치지 않고 중심으로 가야 한다, 추종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게 제 생각이었습니다. 뜻 맞는 동료들의 헌신적 도움, 높아진 한국의 위상, 한류 붐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이런 저널을 통해 학계에 한류 바람을 불러일으켰다고 자부합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지방과 함께
김 교수는 그동안 적지 않은 저서와 논문을 발표했다. 그런데 주제들이 정말 다양하다. '스토리텔링: 시대를 연 영남의 인물' '문화가 디지털을 만났을 때' '사라예보에서 온 편지' '근대화의 담지자(擔持者'뚜렷한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 기생' '다문화시대의 이슬람, 그 반역의 역사' 등등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는다.
이 같은 저술 활동은 그의 표현대로 "게으름 피우지 않고 몸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는 방학만 되면 배낭 하나만 달랑 메고 몇 달씩 지구를 떠돈다. 실크로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전 구간을 답사했고 아프리카와 우리 민족의 뿌리와 관련 있는 것으로 알려진 시베리아 야쿠트 지방까지 다녀왔다. 부럽다고 했더니 그는 "집사람도 싫어하는데 돈과 시간이 남아돌아서 했겠느냐"고 웃으며 반문했다. 그는 1981년부터 20년 가까이 독일, 미국에서 샤머니즘을 연구했다. 'Tschung sun Kim'이란 이름 표기 역시 독일식이다.
"많이 돌아다니다 보니 오히려 내가, 대구가 보입디다. 나가면 견문이 넓어진다는 건 옛말이지요. 다만 어떤 태도로 나가느냐가 관건이 아닐까 합니다. 유럽 배낭여행 때 딱 하루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집에 머물렀는데 '인증 샷' 자랑에만 열을 올리는 우리 여행객들에게 큰 충격을 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여행지의 역사, 문화를 우리 것과 연결시키는 훈련이 돼 있지 않은 탓이겠지만 각자가 가진 소질, 조건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다른 문화와 부딪히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되고요."
김 교수가 일제강점기 대구의 기생 연구에 천착해온 것도 같은 연유에서다.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지역의 미시사(微視史)를 제대로 연구해야 한다는 취지이다. 그는 대구의 문화를 모르면서 한국학을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사람들이 왜 영웅 이야기를 좋아할 것 같습니까? 모두 자신처럼 평범한 주인공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는 과정에 감동을 받기 때문입니다. 대구에는 그런 스토리가 많습니다. 저는 가장 천한 직업군으로 분류되던 근세의 기생이 대표적인 캐릭터라고 봅니다. 늘 주변인에 머물렀고 결코 승리자가 아니었지만 전통문화 계승, 사회운동, 교육과 계몽에 기여했거든요. 대구의 혁신 기생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또 다른 시각의 문화콘텐츠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역사적 사실에 근간을 두고 테마가 있는 '기생거리'도 조성할 만합니다."
◆우리 안의 사대주의를 극복해야
'서울은 나에게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웃는다/ 또 살을 발음해 보세요, 하고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나에게는 쌀이 살이고 살이 쌀인데 서울은 웃는다/ (중략)/ 제 몸의 살이 그 쌀로 만들어지는 줄도 모르고/ 그래서 쌀과 살이 동음동의어라는 비밀을 까마득히 모른 채/ 서울은 웃는다.'
김 교수는 강의 중에 정일근 시인의 시 '쌀'을 자주자주 인용한다고 했다. 타자(他者)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라는 가르침이다. 서울 사람들이 만든, 서울 중심의 사고에 매달리면 지방은 영원한 패자로 남을 것이란 경계(警戒)다.
"학생들에게 우리는 2류가 맞다고 솔직히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런 패배의식만 갖고 산다면 절대 안 된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삶의 진정한 주인공이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지방대학 출신인데, 촌놈 출신인데 뭘 할 수 있겠느냐는 식의 사고를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기성세대도 마찬가지죠. '난 대구 양반이다'라는 자존감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양반다운 양반이 될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서울이 만든 울타리로 도피해서야 되겠습니까?"
'주변'에 대한 그의 각별한 애정은 조만간 '이야기 콘서트 대구문화'(주최 창조문화연구소)로 일반 대중들과의 공감대를 형성할 예정이다. 11월 2일 오후 5시 계명대 대명동 캠퍼스(본관 209호)가 첫 무대이다.
"대구는 벌써 오래전부터 서울을 향한 변방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승자인 서울의 시각만으로는 대구의 정체성을 찾기 힘듭니다. 서울에 비해 모든 게 열악한 지역이란 잘못된 이미지만 남기 마련입니다. 대구의 역사는 오히려 정치적, 사회적 주변인들에 의해 축적된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찾아보니 우리에게도 무엇무엇이 있더라'는 자세는 곤란합니다. 그래선 늘 2등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무엇은 우리에게만 있는 것이다'는 쪽으로 의식이 바뀌어야 합니다."
그는 대구 문화에 대한 연구가 튼튼해지는 데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생각이다. 구한말 대구경북에서 활발한 봉사활동을 펼쳤던 미국 선교사 헨리 M. 브루엔(1874~1959)의 저서 '40 years in Korea'(한국에서의 40년)를 꼬박 2년이나 걸려 최근 번역'역주 작업을 마친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대구 문화에 대한 관심이 최근 부쩍 커졌습니다. 소중한 계기임에 틀림없습니다. 한때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더 활활 타오르기 위해선 우리 모두가 잘 보살펴야지요. 대구 중구 근대골목 투어의 성공도 소중한 교훈이 됐습니다. 이제 필요한 것은 '해석'입니다. 우리의 특수성이 보편성을 띨 수 있도록 이야깃거리를 찾아내는 게 중요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평생 해온 뜬구름 잡는 짓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요."
◇김중순 교수=1954년 의성에서 태어났다. 계명대 독문과를 졸업한 뒤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자알란트대학에서 비교종교학을 전공,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등에서 10여 년간 연구교수로 재임하다 모교 강단에 섰다. 교육공무원이었던 부친을 따라 대구로 전학, 청소년기를 보냈지만 '끼리끼리 문화'를 만드는 악습이라며 출신 학교는 밝히지 말아 달라고 했다.
김 교수의 취미는 합창이다. '대구코럴합창단'에서 바리톤을 맡고 있다. 지휘를 전공한 부인 전효숙(56) 씨의 영향이 컸다. 그는 "합창의 장점은 노래를 잘하게 되는 게 아니라 옆 사람의 소리를 듣는 귀가 열린다는 것"이라며 "타협을 모르던 제 고집도 합창을 통해 조금은 다듬어진 것 같다"고 귀띔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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