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안상학의 시와 함께] 갈대 등본

# 갈대 등본 -신용목(1974~)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문학과지성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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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차가운 곳에서 따뜻한 곳으로, 헐렁한 곳에서 빼곡한 곳으로 불어간다. 바람이 없으면 지구처럼 전속력으로 달려가면 만날 수 있다. 바람의 생리를 곰곰 생각해 보면 우리 삶과 닮았다. 사람살이처럼 춥고 가난하면 따뜻하고 안온한 곳으로 옮겨가려고 무진 애를 쓴다. 바람처럼 사는 거다. 다만 옮겨가는데 그치지 않고 순환하는 것까지도 판박이다.

신용목의 시를 생각하면 우선 떠오르는 이미지가 바람이다. 이 시도 다를 바 없다. 소금이 나는 곳이니 서해가 안성맞춤이겠다. 바람이 불고 석양이 지는 배경으로 갈대밭이 있다. 시위를 닮은 갈대들이 쏘아 올린 새들이 시린 하늘 한끝 펜촉처럼 박혀 있다. 갈대의 휘어진 허리, 초승달, 아버지 꺾인 허리는 닮은꼴로 나란하다. 더욱 저미는 것은 이들의 구멍 난 뼛속, 그 안에까지 부는 바람이다. '갈대 등본'을 떼어보니 시인 자신도 오도카니 들어 있다. 인생은 바람의 유전된 생리와 순환하는 버릇을 닮아서 시공을 오고 간다.

이 시는 바람으로 아픈 생명, 바람 없으면 죽는 인생의 둔주곡이다.

시인 artand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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