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물들어간다는 것

만추(晩秋)라는 단어를 접할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허전해진다면 세월의 무게가 어느 정도 나간다고 할 수 있지요. 늦을 만(晩), 가을 추(秋). 늦은 가을이라는 이 한자어에는 쓸쓸함도 허전함도 그래서 느끼는 공허함도 다 들어 있는 듯해서요. 간혹 찰 만(滿) 자로 혼돈하기도 하지만 뭐 그것도 맞는 듯해요. 다 채워졌기에 늦어진 것이니까요.

이맘때쯤 되면 전국의 조금 이름 있다 하는 산은 단풍보다 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들로 북적이지요. 겨울이 되기 전, 절정에 다다른 자연의 옷을 보고 싶은 까닭이겠지요. 붉고 노란 때론 갈색이 어우러져 색색의 주단을 펼쳐 놓은 듯한 단풍이 실은 나무들의 생존전략이라는데요.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한 나무 나름대로 터득한 생활방식인 거지요.

기온이 내려가면 모든 것이 얼고 그럼 나무가 섭취할 영양분도 적어지잖아요. 겨울을 견디기 위해서는 나뭇잎 하나하나에 공급해주던 영양분을 차단하는데 나뭇잎과 가지 사이에 '떨켜층'이라는 것을 만든다고 해요. 하나의 차단막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떨켜층'이 생기면 이파리는 뿌리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하니 활동을 멈추게 되는 거지요. 그럼 잎의 엽록소가 파괴되고 자가분해가 진행되는데 엽록소의 자가분해과정에서 안토시안이 생성되는 나무는 붉은색이나 갈색 계열로 물들고, 안토시안이 생성되지 않는 나무는 엽록소의 녹색에 가려서 평소에는 보이지 않던 잎 자체의 노란 색 색소들이 드러나면서 노란 단풍이 든다고 하네요.

그러다 그동안 머금었던 수분조차 다 마르고 나면 낙엽이 되어 말라 떨어지는 거지요. 그 떨어지는 모습이 참 쓸쓸하지만 그 자리에 떨어진 낙엽들은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하니 끝까지 제 본분을 다하는 거지요.

어찌 보면 우리네 인생과도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나무로 봐서는 살아남기 위한 준비이고 몸 만들기이지만, 나뭇잎 하나하나로 생각하면 늙어가는 것이잖아요. 봄에 새순으로 피어나 풍성한 여름을 맞고 가을에 가장 화려한 절정의 모습을 보여준 후에 겨울에 안식하는 나뭇잎의 생. 나뭇잎의 이런 '나고 죽음의 반복'으로 나무는 그 자리에서 오랜 세월을 굳건하게 뿌리내리며 살잖아요.

나무를 하나의 가문,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로 생각해보면 개개인은 나뭇잎에 포함되겠군요. 가지의 새순으로 태어나 햇살도 함께 맞고 바람도 함께 견디어내어 풍성하고 다디단 열매를 맺고 생의 가장 절정의 순간을 온몸으로 피워낸 후, 떨어져 스스로 나무의 자양분이 되는 나뭇잎의 생애처럼 그렇게 순기능의 삶을 산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생각만 해도 근사하지 않나요? 나뭇잎은 다른 나뭇잎을 미워하지 않고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그저 자기 자리에서 그렇게 충실히 나뭇잎 모습 그대로 살아내고 있으니 말이에요.

그러고 보니 물들어간다는 것은 생의 가장 완벽한 모습이자 가장 완전한 희생이군요. 삶의 터전이었던 나무의 성장을 위해 자신 안의 본질을 다 내어놓고 스스로 물들어 겨울을 맞이하기 전, 가장 화려한 나무로 만들어주는 나뭇잎들.

'20세기 가장 완전한 인간'으로 평가받는 체 게바라의 시가 떠오르는군요. 시인이자 혁명가였던 체 게바라는 '리얼리스트'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지요.

'너무 외로워하지 마! 네 슬픔이 터져 빛이 될 거야!'

이 가을, 어떤 낭만적인 시보다도 나뭇잎의 생을 극명하게 말해주는 시가 또 어디 있나 싶을 만큼 슬픈 환희를 느끼지요. 어쩌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자기 생의 가장 최고의 색을 내어 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나뭇잎들의 생처럼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는 시이기도 하고요.

그래요. 물들어간다는 것은 세상을 향해 가장 잘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존재 가치를 각인시키는 일인 거 같아요. 잘 물들어가기 위해 잘 준비해야겠어요. 그래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뭇잎이 될 거 같아서요.

곧 단풍은 낙엽으로 떨어질 것이고 우린 쓸쓸함을 느낄 겨를도 없이 겨울 속으로 들어가겠지요. 가을의 끝자락, 만추가 다 가기 전에 예쁘게 물든 단풍들에게 '정말 잘 살아냈다고, 너는 세상의 빛이라고' 그렇게 말해줘야겠어요. 이 가을이 다 가기 전에 말이에요.

권미강/뮤지컬 '바람이 불어오는 곳' 홍보 프로듀서 kang-momo@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