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노래방

머나먼 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이 엄청나게 변해버린 주변 모습에 적응하지 못하는 이야기는 전쟁 후일담에서부터 SF물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서사 장르로 창작되었다. 여기, 나의 귀환 이야기는 그만큼 대단하지 않다. 노래방을 처음 갔던 이야기니까. 군인 시절, 나는 그때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질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휴가 나와서 이별 통보를 하러 갔다. 그녀가 다니던 대학교에 갔다. 내 생각은 한적한 찻집에 앉아서 매정한 말을 하고, 그녀가 내 뺨을 때리면 기꺼이 맞고, 물을 얼굴에 뿌리면 그 또한 피하지 않을 거란 각오도 섰다.

5월의 대학 교정에는 축제가 한창 벌어지고 있었다. 캠퍼스 한쪽에서는 물 담은 풍선 터뜨리기 놀이가 한창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1980년 광주의 참상을 소개하는 사진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수훈련 표식을 가슴에 달고 베레모를 쓴 나는 왠지 죄인처럼 주눅이 들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여자 친구는 나를 이끌고 주막촌 텐트를 찾아갔다. 여자 친구의 친구와 선배라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와서 술자리는 불어났다. 애당초 내가 생각했던 계획과는 다르게 일이 흘러갔다.

술자리 분위기가 깊어진 다음, 누군가의 입에서 노래방에 가자는 말이 나왔고 사람들은 비틀거리며 그곳을 갔다. 내가 입대하기 전에는 가보지도 들어보지도 못했던 노래방이란 곳은 어떤 상가 지하에 있었다. 컴컴한 방에 들어가서 앉자 TV에서 반주가 나왔고 사람들은 차례대로 메뉴판같이 생긴 책에서 고른 노래를 불렀다. 내 차례가 되었고, 사람들은 '군인 아저씨'를 연호했다. 잔뜩 얼어서 세상에서 제일 약해진 군인은 난생처음 노래방 마이크를 잡게 되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늘 좋아하던 들국화의 '그것만이 내 세상'이 내 눈에 들어왔지만 내 목청으로 부를 수 있는 노래는 아니었다. 그때 심신의 '그대 슬픔까지 사랑해'를 찾았다. 만만해 뵈던 그 노래는 내 인생 최초의 노래방 레퍼토리가 되었다. 여자와 헤어지려고 찾아간 판국에 그대의 슬픔까지도 사랑한다니. 결국 못 헤어졌다.

그때 나는 고작 1년을 세상과 떨어져 살았다고 온갖 어리숙한 티를 냈던 거다. 그런데 창작에 전념하는 예술가 중 일부도 나와 비슷하게 방금 저 세상에서 왔을 법한 실수를 벌인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달리 세상으로부터의 격리를 본인들 스스로 선택한다. 나는 예술적인 성취를 이뤄가던 작가들이 어느 순간 눈과 귀를 닫고 자신이 쌓아놓은 세계 안에 갇히는 걸 숱하게 본다. 그들 중 어떤 사람은 기성작가라며 후배들에게 자기 태도를 강요한다. 또 누구는 대학교수라며 학생들에게 자기 작품을 정전으로 내세운다. 매사에 감을 잃지 않고 동시에 겸손할 수 있는 건 정말 어렵다.

윤규홍(갤러리 분도 아트디렉터) klaatu84@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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