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사랑의 아이콘 소피 마르소 '라붐'
# 아름답고 슬픈 사랑'8월의 크리스마스'
# 추의억 사랑영화 재개봉
가을이 깊어간다. 온 산이 울긋불긋 단풍으로 물들더니 급기야 도시에서도 단풍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단풍을 동반한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다가 이내 성숙하게 만든다. 가을이 깊어간다는 것은 한 해가 저물어간다는 증거이니, 자연스럽게 자신이 돌아온 삶을 돌아보게 된다. 무엇을 해야 할지 반성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가을에 두 편의 영화가 재개봉된다. 간간이 재개봉되는 영화를 만나기는 했지만, 이 가을에 재개봉되는 두 편의 영화는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영화들이다.
먼저 소피 마르소 주연의 '라붐'. 소피 마르소? 만약 그녀를 안다면 198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이고, 그녀를 모른다면 그 이후 세대임에 분명하다. 1980년대의 청소년이라면 단언컨대 이 영화를 모를 수 없다. 당연히 '아! 소피 마르소'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와야 한다. '라붐'은 그런 영화다. 이 영화를 통해 소피 마르소는 하이틴의 우상이 되었다. 당대 최고의 스타. 집집마다 청소년들은 소피 마르소의 사진을 책상 앞에 걸어 두었고, 책받침으로 그녀의 사진을 코팅해 사용했었다. 그 시절 소피 마르소는 전 세계 10대의 우상이었다.
1980년대 3대 여신은 소피 마르소,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 등이었다. 이 3명의 인기는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다. 당시 영화계의 분위기는 한국영화보다는 외국영화를 선호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으리라. 하긴 음악도 국내 음악보다는 팝을 주로 듣던 시기였으니. 브룩 쉴즈가 '푸른 산호초'에서 화려한 몸매를 과시하며 아름다움을 뽐냈다면, 피비 케이츠는 '파라다이스'와 '프라이비트 스쿨'로 순수와 섹시미를 겸비한 매력을 과시했고, 소피 마르소는 '라붐'으로 청순함 그 자체라는 평가를 받았다. 1966년생인 그녀가 1980년에 만들어진 영화, 그러니까 실제 14살의 나이에 13살 사춘기 소녀의 첫사랑을 연기한 것이니 그럴 만도 했다. 육체를 전시한 브룩 쉴즈, 피비 케이츠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라붐'(La Boum)은 그녀를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파리로 전학 온 13살 소녀 빅은 사춘기이다. 어느 날 첫눈에 반한 마티유를 알게 되고 파티에서 그와 로맨틱한 시간을 가진다. 처음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 어쩔 줄 몰라하는 빅은 할머니에게 코치를 받아 그와 짜릿한 데이트를 감행한다. 사실 이렇게 줄거리만 요약하면 당시의 기분이 전혀 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의 주제가인 리처드 샌더슨의 'Reality'가 더 달콤하게 다가온다. 파티에서 친구 사이에 끼어 디스코를 추는 빅의 뒤에서 마티유가 헤드폰으로 이 음악을 들려줄 때, 디스코 음악은 사라지고 갑자기 달콤한 발라드가 감미롭게 흐른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은 블루스를 춘다. 신기하게도 이 영화는 당시 극장에서 개봉되지 않았다고 한다. 비디오와 케이블을 통해서만 영화를 본 것인데, 이번에 큰 스크린으로 만날 수 있다.
다음 영화는 허진호 감독의 '8월의 크리스마스'이다. 보고 또 보아도 언제나 가슴이 아린 영화. 한국영화의 최고봉 가운데 하나인 것이 분명한 영화. 이 영화를 통해 한석규와 심은하는 최고의 스타가 되었다. 두 스타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 한석규의 그 우수 어린 눈빛, 심은하의 그 안타까운 눈물. 국내 팬들에게 잊을 수 없는 걸작이 된 '8월의 크리스마스'가 11월 6일 재개봉된다.
이 영화는 개봉 당시 장윤현 감독의 '접속'과 더불어 멜로드라마 전성시대를 연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이른바 '무균질 멜로드라마'의 탄생. 억지로 눈물을 짜내는 신파적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잔잔하게 아픔을, 보일 듯 말듯 드러내지 않으며 보여준다. 설마 저들이 헤어질까, 아무도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저들이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 살짝 걱정되기도 한다. 이름도 촌스러운 초원사진관의 노총각과, 스무 살의 풋풋한 주차 단속원은 그렇게 스치듯 만나지만 결국 헤어지고 만다. 주차 단속원 다림은 그렇게 사랑의 아픔을 안고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엔딩이 참 인상적이다. 사진사 정원이 죽은 뒤에도 다림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한다. 다른 곳에 파견되었던 그녀는 이제 계절이 겨울로 바뀌어 눈으로 쌓인 사진관을 찾는다. 거기서 자신의 사진, 활짝 웃고 있는 사진을 보며 웃으면서 떠나간다. 정원은 웃으며 그녀가 떠날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정작 영화는 정원의 내레이션으로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나게 해준 당신에게 감사하다"라며 인제야 고백을 한다. 이 역설. 서로를 배려하는 이 마음. 그 마음이 있기에 엔딩에는 거의 20여 분 동안 한 마디의 대사가 없어도 그 아픔과 웃음을 고스란히 전한다.
인생은 단지 흘러가지만은 않는다. 시간은 지나가지만 추억은 고스란히 남는다. 사랑은 떠나가지만 사랑이 남긴 흔적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사랑은 떠나가도 언젠가 사랑할 때 새긴 글씨, 함께 갔던 장소의 그 체취는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면서도 조용히 남아있다. 그래서 떠나가고 보내도 사랑은 떠나가지 않는다. 가슴에 더 깊이 쌓여갈 뿐이다. 그 추억과 흔적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늦가을, 한때 아름다운 시절을 만들어준 영화를 보며 회상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추억의 영화는 그런 힘을 지니고 있다.
<영화평론가·광운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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