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맛 향토음식의 산업화] 싱가포르 바다게 찜요리 '점보 칠리크랩'

살아 있는 게의 '붉은 유혹'

싱가포르에서 전통음식이라고 하면 단연 점보(Jumbo)라는 레스토랑에서 만드는 칠리크랩을 든다. 공항에서 나와 택시를 타고 싱가포르 전통 음식점으로 가자고 하면 십중팔구가 점보 레스토랑으로 안내한다. 칠리크랩을 대표 메뉴로 블랙페퍼크랩 등 해산물 요리가 전문인 점보 레스토랑은 단순한 맛집 규모가 아니라 외식기업이다. 점보의 전통 향토음식 칠리크랩의 산업화와 국제화는 싱가포르 국내 체인망 구축은 물론이고 일본 본토에도 상륙해 체인점을 3개나 개설했다. 자국산 향토 특산물이 아닌 인근 스리랑카산 게를 수입해 이를 재료로 신화적인 외식산업을 일으킨 점보의 기록적인 사업 실적을 보면 향토음식 산업화의 경제적 가치와 그 위력을 다시 한 번 더 실감할 수가 있다.

◆칠리크랩은 싱가포르 전통음식 랜드마크

"싱가포르 전통음식이요? 스태미나 푸드로 '개구리 죽'이라고 있는데 혹시 그걸 찾는 건 아니겠죠?" 싱가포르 국제공항에서 공항택시 기사한테 괜찮은 전통음식점으로 안내해 달라고 하니 대뜸 하는 반문이다. "노"라고 하니 곧장 "그러면 여기서는 점보 칠리크랩뿐이다. 단연 최고다"고 한다. 기사는 곧장 싱가포르 뎀프세이 스트리트 BLK 11번 구역의 바다게 요리 전문점 점보 레스토랑으로 쏜살같이 내달린다.

'점보-칠리크랩'은 마케팅을 잘해서 싱가포르 공항 택시기사들이 잘 아는 음식점이 아니다. 싱가포르 특산음식으로 자리를 굳힌 지 오래돼서 그렇다. 마치 안동이라고 하면 간고등어를 들고, 영덕이라면 대게를 꼽고, 울릉도라면 오징어를 향토음식으로 치는 것과 같다.

오후 4시쯤 점보 레스토랑에 도착했으나 종업원들은 "지금은 장사를 하지 않고 오후 6시라야 문을 연다"고 한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저녁 예약손님을 위한 음식 준비에 바쁘기 때문이란다. 그렇지만 벌써 점보 가게 앞 도로변에는 손님들이 몰고 온 것으로 보이는 고급 외제 승용차가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다. 하는 수 없어 주변 커피 전문점에 갔더니 미리 온 손님들이 자리를 꽉 채우고 앉아서 점보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점보는 음식점이 아니라 이름처럼 거대한 대기업형 외식산업체이다. 뎀프세이 거리에 있는 점보 본점은 좌석 수 340석에 종업원이 40명이지만 싱가포르 내에 칠리크랩 전문 6개 체인점 중에서는 가장 적은 규모이다. 이곳은 싱가포르 경제활성화 지구여서 손님 중 외국인 투자자들의 비율이 40% 정도고 부자들이 많이 살아 레스토랑을 찾는 고객들은 상류층이 대부분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이 많이 찾는 인근 창이지역 체인점은 하루 손님이 2천 명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자국 내뿐만 아니라 일본 오사카와 도쿄에도 진출해 모두 3개의 체인점을 직영체제로 개설해 두고 있다. 여기에다 최근에 문을 연 2개의 차이나음식 전문점과 4개의 시푸드 전문점도 모두 좌석 수 1천 석이 넘는 매머드급이다.

"중국 토이주 지방의 유명한 주방장을 초빙해 와서 중국 본토의 맛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점보 13개 점포의 홍보와 국내외 마케팅을 총괄 담당하고 있는 숀찬(30) 씨는 점보의 주 메뉴인 칠리크랩 맛을 똑같이 규격화하기 위해서 모든 체인점을 직영체제로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직 나이가 젊은데도 싱가포르 외식업계에선 영업수완이 뛰어나기로 소문이 자자하다.

◆야외 식탁을 더 선호하게 하는 '내추럴 인테리어'

어둑어둑 땅거미가 질 무렵 점보의 레스토랑 건물 밖 야외식당의 천장 커튼이 천천히 열린다. 남국의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별들이 그대로 식탁 위에 쏟아진다. 기막히게도 자연환경을 인테리어에 활용하고 있다. 서늘해진 공기도 상쾌하다. 예약 손님들이 실내보다 야외 식탁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커튼 끝 자락에도 펴고 접을 수 있는 상점용 캐노피를 달아 더 많은 야외용 테이블을 깔 수 있도록 해 놨다. 약 660여㎡(200여 평) 되는 식당 외부에 한낮의 햇볕을 가려 주는 커튼을 단 것은 '굿 아이디어'다. 바닥은 티크 목으로 마루를 깔아놓고 10인용과 5'6인용, 3'4인용, 2인용 테이블을 다닥다닥 붙여 놓았다.

주방에서 요리과정 중 발생하는 연기는 2개의 강력한 환풍기를 통해 식당 밖으로 배출한다. 그래서 주방이 실내에 완전 공개되어 있어도 손님들에게 조리 과정의 음식 냄새를 풍기지 않는다. 벽면 한쪽은 국내 유명 맛집과 마찬가지로 각종 상장과 감사패, 신문방송 보도사례로 도배되어 있다.

여종업원 캔디 티엔(23) 씨가 내민 메뉴판에는 칠리크랩이 ㎏당 56달러. 블랙페퍼크랩 58달러, 꽃빵이 4개에 60센트라고 적혀 있다. 몇 가지 와인이 있을 뿐 요리 메뉴는 이게 전부다. 다만 비닐팩에 포장된 칠리, 페퍼소스를 각각 8달러씩에 팔고 있다고 추가로 써놨다.

티엔 씨는 "음식도 팔지만 칠리, 페퍼크랩 레시피도 소스를 포장하는 방법으로 상품화해서 팔고 있다"고 귀띔한다. 소스는 20년 전에 개발한 것인데 비닐팩으로 포장해 전 세계로 팔려나간다고. 맛 자체가 곧 상품임을 보여 준다.

미리 준비된 식탁에는 볶아서 껍질을 벗기고 반씩 갈라 놓은 쪽땅콩과 칠리소스 그릇이 놓여 있고 나지막하고 네모난 유리그릇에 레몬조각을 넣은 물이 담겨 있다. 목마른 김에 들이켜려 하니 여종업원이 "오우! 노! 오노!" 하면서 기겁을 하고 달려온다. 먹는 물이 아니고 손가락을 씻는 물이란다. 칠리크랩을 먹을 때 손가락을 씻는 용도로 물을 떠 놓은 것. 여종업원이 맥주컵처럼 생긴 큰 유리컵에 물을 따라 주면서 "이게 먹는 물"이라며 빙그레 웃는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자마자 여종업원이 카메라와 핸드백, 모자 등 소지품에다 비닐봉지를 씌워 놓는다. 분실이 우려되어서 그러는가 했더니 식탁 위의 물이 엎질러질 때 젖게 되거나 소스가 묻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란다. "세상에! 유명세만큼 서비스도 빈틈이 없구나!" 동행한 사진작가가 탄성을 지른다.

◆스리랑카산 게를 수입해서 전통음식 재료화

살아 있는 게를 즉석에서 잡아 요리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단다. 먼저 나온 것이 칠리크랩이다. 집게다리가 등딱지에 비해 무척 크다. 등딱지를 벗기고 큼지막한 집게다리는 깨뜨려서 조리되어 있다. 양념을 제대로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란다. 다리도 마디마디 분리해서 조리를 했다. 게 껍데기가 바닷가재처럼 단단하다. 점보에서 16년째 일한다는 매니저 켄 테오(42) 씨는 "게살 본연의 맛을 살려 내는 방향으로 조리를 한다"면서 "게 요리 중에도 특히 칠리크랩이 고객들이 가장 선호하는 메뉴"라고 설명했다. 또 "소스에 토마토가 들어 있어서 달기도 하면서 토마토와 칠리가 서로 맛이 잘 어울려서 매콤한 맛을 내는 게 특징"이라고 말했다. 블랙페퍼크랩에는 향채를 조금 쓴다. 블랙페퍼의 맛이 입안이 얼얼할 정도로 맵다. 그래서 다리 하나를 뜯어 보면 매워서 이마와 콧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영덕대게처럼 게딱지 속에 게장이 있나 찾아보니 전혀 없다. 게딱지는 그냥 꾸밈용으로 접시에 차려 놓은 것 같다. 게살은 다리 부분에만 있다.

금세 식탁 위가 게 껍데기로 지저분해진다. 그러나 여종업원이 금방금방 게 껍데기를 치워 주고 앞접시도 갈아 준다. 레몬조각을 넣은 손가락 씻는 물이 긴요하다는 것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게 다리를 집어들고 뜯어 먹을 때마다 양념이 손가락에 묻는다. 레몬조각을 행주 삼아 주물럭거리면서 자주 손가락을 씻어야 식사를 할 수가 있다. 손가락에서 나는 레몬향이 게맛을 더욱 상큼하게 해 준다. 집게다리 속살이 통통한 게 제법 많이 들어 있다. 게다리 겉껍질을 부수는 식탁용 펜치가 참 편리하다. 칠리크랩은 소스에 토마토를 써서 달고, 블랙페퍼크랩은 고추를 섞은 후추를 써서 매운맛이 강하다. 칠리크랩은 접시에 담아 내고 페퍼크랩은 쇠냄비에 익혀서 낸다. 곁들여 나오는 꽃빵도 찐빵처럼 찌는 것과 튀기는 것이 있는데 취향에 따라 선택할 수 있다.

"경쟁력은 신선한 활어 게를 요리재료로 쓰는 것에서 나옵니다. 스리랑카산 특급 게만 수입해서 씁니다." 매니저 켄 테오 씨는 이곳에서 쓰는 게는 모두 스리랑카 크랩만을 쓴다고 설명했다. 스리랑카에서 매일 매일 잡히는 전량이 싱가포르 점보로 공수된다고. 그러나 부식재료는 모두 싱가포르산을 쓴단다. 그래서 칠리크랩이 특산화된 싱가포르 전통 향토음식으로 인식될 수 있었다고 한다. 페퍼크랩 역시 그렇다. 요리에 싱가포르산 통페퍼를 갈아서 만든 파우더를 쓴다. 통페퍼라서 매운맛이 강렬하다. 두 가지 메뉴가 상반된 맛이기 때문에 고객들의 기호를 양분해 주는 효과를 낸다고. 그래서 메뉴의 가짓수를 줄여 낼 수 있어서 주방일을 크게 덜 수 있었다고 한다. 주방일에 지친 외식업자들이 들으면 무릎을 칠 아이디어가 아닐 수 없다.

싱가포르 뎀프세이에서 권동순기자 pinoky@msnet.co.kr 사진작가 차종학 cym47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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