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해방 하자마자 제2의 식민지?…법원·극장·주점 문닫고 반대시위 확산

4개국 신탁통치 논란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미'영'소 3개국 외무장관들은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안을 합의했다. 미'영'소'중 4개 강대국의 관리 하에 남북한이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가 요청할 경우 4개국이 5년간 조선을 신탁통치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일제의 호구에서 이제 막 벗어난 조선 사람들에게 신탁통치 안은 망국의 소식만큼 절망적이었다. 분노가 폭발하고 반대시위가 물결 쳤다.

삼상회담 협상안의 현실적 판단은 나중 문제였다. 당장은 4개국 통치라는 부분만 귀에 들어왔다. 시장은 철시하고 극장과 주점은 물론 법원까지 문을 닫고 시위에 나섰다. 반탁 시위는 좌우익이 함께 나섰다. 신탁통치 안은 원래 미국이 주장한 것이었다. 해방 전 중경임시정부는 미국을 중심으로 한반도에 대한 국제공동관리 안이 나올 때마다 강경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반탁에 좌익이 더 빨랐다. 박헌영의 조선공산당은 '5년은커녕 5개월의 통치도 반대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전평 문학가동맹 등 좌익 단체들도 반대성명을 잇따라 발표했다.

남한 전역을 휘몰아가던 반탁 바람은 박헌영의 북한 방문 이후 역전됐다. 반탁운동을 벌이지 말라는 소련의 훈령을 따르지 않으려는 박헌영을 평양에 호출한 소련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후견이라고 박헌영을 설득했다. 소련은 남북 전역에서 공산당 지지도가 어느 정당보다 높으므로 통일 임시정부가 수립되면 공산당이 집권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득했다. 이미 북한에서는 소련이 반탁 입장을 굽히지 않던 조만식을 연금하고 조선민주당 지도부에 공산주의자들을 앉혀 대세를 친탁으로 몰아간 뒤였다.

공산당의 찬탁을 미국은 역이용했다.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공산당은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잃어갔다. 상대적으로 우익의 지지는 높아졌다. 신탁통치 찬반 논란은 너 죽고 나 살기 식의 극렬한 싸움이었다. 미국은 남한의 반탁운동을 반소 반공의 소재로 삼기로 전략을 수정했다. 미국도 남북한이 선거에 나설 경우 한반도의 공산화가 우려된다고 판단했다. 공산당의 선택이 바뀐 뒤 남한의 정국 상황도 역전됐다. 미국과 우익은 반탁, 소련과 좌익은 찬탁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 대중적 선전에서 반탁을 내세운 미국과 우익이 공산당을 누르기 시작했다. 대중에게 반탁은 외세의 간섭 없는 자주 독립국 건설로 인식됐다. 이후 남한의 정국은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목표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갔다.

서영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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