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종교칼럼] 첫 서리

천주교 대구대교구 산 자연학교 교장 정홍규 신부
천주교 대구대교구 산 자연학교 교장 정홍규 신부

손님이 예정시간보다 빨리 도착하면 집안이 분주해지듯이 서리가 내린 후 우리 동네가 더 분주해졌다. 올해는 첫 서리가 지난해보다 더 빨리 내렸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똥냄새나는 은행 열매도 털고, 팥도 털고, 벼도 벴다. 올 김장 배추용에는 알이 배기라고 짚으로 머리띠를 둘렀다. 벌써 처마 밑에 감을 깎아 곶감을 만들어서 걸어놓았다. 마침 도리깨질로 콩타작하는 데가 있어서, 나도 한바탕 도리깨로 콩타작을 했다. 함께 도리깨질로 콩타작을 할 때는 호흡이 척척 맞아야 된다. 즉, 치고 빠지는 밸런스를 유지해야 된다. 최근에 협동조합이 바람을 타고 여기저기에서 협동조합을 만드는 붐이 일어나고 있다. 하루에 여섯 개씩이나 만들어진다고 한다. 올해 지금까지 만들어진 협동조합은 전국적으로 3천 개가 된다고 한다.

올해 신규 협동조합의 가동률은 30~40%밖에 안 된다고 하니,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다. 동업하면 망한다는 속설을 깨고, 협동에서 의미있는 일을 창조해나가는 것은 마치 도리깨질처럼 손발을 맞추고 참으로 발효기간과 뜸을 들이는 기간이 필요하다.

너도나도 협동조합을 만들고 싶지만, 절대 성급해선 안 된다. 조바심이 없어야 되고, 보이는 성과에 연연해선 안 된다. 공장에서 몇 시간 만에 부화된 달걀은 햇볕도 안 드는 양계장에서 30년 수명을 한 달도 못 채울 운명일 것이 뻔하다. 협동조합의 붐을 양계장 부화형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났느냐'는 말이 있다. 협동조합 운동은 요즘 세상같이 '돈 나고 사람 났지'라는 풍조에서 '아니 사람 나고 돈 났지'로 바꿔가는 운동이다. 자본과 돈으로 하향화시키는 논리에서 사람을 상향화시키는 이 작업은 긴 호흡이 필요하다.

내가 만든 푸른평화 소비자 생활협동조합도 만든지가 10년이 되었지만 20년 전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연대해서 우리농촌 살리기를 10년 동안 한 결과에서 이 조합을 만들었다. 푸른평화 생활협동조합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의 20년이 걸렸다. 아프리카 속담에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말이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양극화를 메꿀 수 있는 대안은 다름아닌 '협동, 상생, 연대'다.

어미닭이 병아리를 데리고 밭에 나들이를 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어미닭은 땅을 쪼아서 먹을 것을 찾아내어서 자신은 먹지 않고 땅을 파내주면, 병아리가 그것을 먹는다. 별로 하는 일이 없어 보이지만 어미닭은 병아리에게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 어미닭은 병아리가 달걀을 스스로 깨고 나올수 있도록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부위를 아주 정확하게, 섬세하게 쪼아 주는 것이다. 그것이 줄탁동시(◆啄同時), 우리 시대에 꼭 필요한 협동이다.

천주교 대구대교구 산 자연학교 교장 정홍규 신부 comomonte@daum.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