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에세이 산책] 안과 밖

세상을 뜨겁게 달군 고위 공직자의 혼외(婚外) 아들 사건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우리네 삶이 드라마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는 것이었다. 정치'권력'사랑'불륜'권모술수가 비빔밥처럼 골고루 배합되어 있지 않은가.

젊은 날 내가 살던 아파트 아래층에는 멋쟁이 부인이 살고 있었다. 나하고 동갑이었으나 결혼이 늦어 사십대 초반에 겨우 첫아들을 낳았다. 그에 비해 나는 졸업과 동시에 결혼하여 딸만 무려 셋이나 낳은 한심한 여자였다.

우리의 관계는 이유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매일 아침 셋째 딸의 하루치 이유식을 만드는 나를 그녀가 먼저 기웃거렸고, 나는 그녀의 수입품 거버 이유식과 슬라이스 치즈를 부러워했다. 그녀는 홈웨어 같기도 하고 파티 드레스 같기도 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들에게 이유식을 먹이곤 했다. 어쩌다 내가 만든 이유식을 조금 덜어 가져가면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마지막 한 톨까지 알뜰하게 먹였다.

그녀는 결혼 전 언론사의 미국 특파원이었다고 했다. 어쩌다 '차 한잔 하자'는 전화를 받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면 우아한 모습으로 AFKN 뉴스를 보고 있었다. 한 번은 커피 원두를 금방 갈았다면서 전화가 와서 내려갔더니 미국 드라마를 보는 중이었다. 나는 거기서 나오는 현란한 영어를 접하면서 학교 다닐 때, 영어 공부에 등한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TV를 끈 그녀가 드라마의 내용을 요약해서 들려주었다. 성공한 미모의 여주인공이 독신을 고집하는데 아이를 갖고 싶은 것이 문제였다. 의사가 권하는 정자은행은 동물 수정 같아서 내키지 않았다. 궁리 끝에 여주인공은 머리 좋고 잘생긴 혼외 남자를 골라 '사랑으로 빚은 아이'를 가지려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소한 주제이기도 했거니와, 그녀에게서 뜻 모를 정서적 괴리감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해답은 얼마 후 나타났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일이 그녀에게 일어난 것이었다. 아래층에서 고함 소리, 기물 부수는 소리가 나서 내려가 보니, 본처 식구들이 떼로 몰려 와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끌고 있었다.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욕설과 비명에 섞여,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아파트에서 사라진 후 그녀를 만난 일은 없다. 안에서는 끊임없이 밖을 향해 깨금발하다가 밖에서는 호시탐탐 안을 탐하고 기웃거리던 여인. 안과 밖을 쉼 없이 저울질하며 욕망의 늪을 허우적대던 여인.

재미있지도, 새로울 것도 없는 불륜 뉴스를 접하면서 문득 그녀가 궁금해진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혼외로부터 얻은 그녀의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소진/에세이 아카데미 강사 giok040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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