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1일 나는 패배했다. 물론 나는 이길 수 없을 거란 걸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침묵하고 지나갈 수 없었기에 선택한 승부였다. 언젠가는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서슴없이 소송의 길로 나아가게 했다.
청와대 대문에는 일본식 석등이 설치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통미술사에 의하면 궁궐이나 민가에 석등이 설치된 전례가 한 번도 발견되지 않는다. 석등은 묘지나 사찰에서만 발견될 뿐이다. 석등은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종교적 이유'로 설치되는 구조물이다. 청와대 대문의 석등은 최소한 우리 문화적 전통에서 볼 때는 대단히 이질적인 것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좀 더 심도 있게 살펴보면 우리는 청와대 대문의 석등 양식이 야스쿠니 신사와 같은 일본 신사의 양식이란 사실과 조우하게 된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궁궐 건축은 일본식 조경에 많이 오염될 수밖에 없었고, 해방 이후 궁궐의 일본식 조경문제는 사회문제가 되어 지속적으로 철거되어 왔다. 창덕궁 앞의 일본식 석등, 환구단의 일본식 석등, 서울 국립현대미술관의 일본식 석등 등이 잇달아 철거된 것이 좋은 사례다.
청와대는 원래 조선시대 경복궁의 일부였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 후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 청사(廳舍)를 신축하면서 1927년 오운각(五雲閣) 외의 모든 건물과 시설을 철거하고 총독관저를 이곳에 짓는다. 따라서 청와대가 일본식 조경에 오염될 여지가 많았고, 실제로 이미 학계와 문화재청에 의해 '일본식 조경'이 지적된 사항이었다. 그러나 다른 궁궐의 일본식 조경이 철거되거나 개선된 것에 반해 청와대의 일본식 조경 문제는 아직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흐름에 힘입어 나는 2013년 1월 청와대 석등에 대해 철거를 요청하는 소장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출했다. 그리고 재판과정에서 청와대 석등이 일본식 석등으로부터 파생한 것인지에 대해 문화재청에 사실조회를 신청했었다. 문화재청은 석등은 궁궐 조경에 사용된 적이 없으며, 사찰과 묘지에만 나타나는 점, 일본 신사에 출입문에 석등이 설치된다는 점, 그리고 청와대 석등이 일본 신사의 석등과 유사성을 일부 보이는 점 등을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끝내 청와대 석등을 철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민의 한 사람이 정부기관 구조물에 대해 철거를 신청할 민사상의 권리가 있다고 판단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2010년 경술국치 100년을 맞는 시점에도 나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을 상대로 무모한 소송을 진행했던 적이 있다. 국과수에 보관된 여성 생식기 표본을 폐기하라는 소송이었다. 국과수는 일제강점기 때 유명한 기생 명월이의 생식기 표본을 보관하고 있었다. 명월관 기생 명월이가 사망한 뒤 일본 경찰이 성적인 호기심에 의해 생식기를 절취, 인체 표본으로 만들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사실 확인 결과 소문은 사실이었다. 나는 성적 호기심에 의해 여성 생식기를 표본으로 만든다는 것은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반인권적 행위에 대해 더 이상 방관할 수 없다는 취지에서 표본의 파기와 장례절차를 거쳐 봉안해 줄것을 사법부에 요청한 것이었다.
사법부는 국과수에 대해 표본의 파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화해권고를 제시했고, 국과수는 이를 받아들여 여성생식기 표본을 파기했다. 재판에는 졌지만 이른바 패배가 결국에는 승리로 이어진 셈이다.
청와대의 정문은 우리나라 얼굴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청와대 정문이 솟을대문과 같은 모습으로 건립된다면, 경복궁의 풍광과도 어울릴 뿐만 아니라 전통의 한국미를 고상하게 풍겨낼 수 있지 않을까?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전통양식을 배제하고, 굳이 일본 야스쿠니 신사 같은 일본식 석등을 언제까지 그곳에 남겨 놓아야 하는 것일까? 나는 즉각 항소를 결정했고, 조만간 고등법원에서 청와대 일본식 석등 철거의 2차전을 준비 중이다. 문득 언젠가 청와대 앞길에서 한국미가 물씬 풍기는 전통 솟을대문을 만나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꿈꾸어 본다. 어쩌면 나는 고등법원에서도 또다시 패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2013년 대한민국에서의 패배가 영원한 패배는 아닐 거라고.
혜문 스님 문화재 제자리찾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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