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 대통령 선거에서 핵심으로 내세운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 공약은 절묘한 선택이었다. 민주당이 취할 법한 가치들을 먼저 가져가는 '이슈 선점' 방식으로 지지층을 넓히는 효과가 있었다. '선거의 여왕'이 정치 인생의 마지막 최대 승부처에서 깨끗한 결정타를 날려 권력의 정점에 다가가는 순간이었다.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는 대선 승리뿐만 아니라 대선 이후의 국민 통합을 위해서도 올바른 방향타였다. 박 대통령이 '국민 통합'과 '대탕평' 공약을 별도로 강조했지만,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 자체가 국론을 한데 모을 수 있는 그릇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았던 국민도 한 단계 진전될 것이라며 일말의 기대를 가졌다. 박근혜정부가 대결의 정치를 완전히 끝내지는 못하더라도 반대 진영이 어느 정도 공감하는 길을 걸을 것으로 여겨져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정치 쇄신'의 약속도 함께 제시됐기에 그러한 믿음이 터무니없지 않았다.
그러나 박근혜정부가 출범한 지 9개월이 다 되어가는 지금, 기대와는 너무나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다. 복지 확대와 경제민주화 공약이 쪼그라들어 실망감이 생겨났다. 공약이 축소되거나 수정될 수 있긴 해도 최선을 다한 뒤에야 설득력이 있는데 정책 초기에 그만 바꾸고 말았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이 터진 것은 어두운 그늘을 더 짙게 드리웠다.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사건은 경찰 수사 축소 의혹, 채동욱 검찰총장과 윤석열 검찰 수사팀장의 '찍어내기'로 이어지면서 수사의 신뢰성을 갉아먹었다. 또 국군사이버사령부와 국가보훈처의 대선 댓글 사건도 불거져 국정원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으로 번지고 있다. 전 정부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해도 이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으면 현 정부의 책임이 될 수 있다. 'NLL 대화록'이 유출돼 대선에 활용된 의혹은 김무성, 권영세 등 현 정부 인사들과 관련된 부분이기도 하다. 이에 대한 수사 역시 공정하게 이뤄져야 하나 지지부진하기만 하다.
박 대통령과 청와대가 잘못 대처하는 바람에 파장이 커졌다. 박 대통령이 침묵을 지키다 '공정한 수사'를 언급했지만, 지금까지의 흐름을 보면 신뢰를 보내기가 쉽지 않다. 국정원이나 사이버사령부가 조직적 개입에 선을 긋고 직원들의 개인적인 일탈로 치부하고 있으나 앞뒤가 맞지 않는 사실이 잇따라 밝혀지고 있다. 국정원 여직원의 변호사 비용을 국정원이 댄 것이 단적인 예다. 문제를 덮으려는 데 급급하다가 이를 뒤집는 정황들이 나타나니 문제가 더 커지고 있다. 새누리당 황우여 대표, 최경환 원내대표, 홍문종 사무총장, 윤상현 원내수석부대표 등 여당 지휘부는 정부를 옹호하는 데 골몰하고 있다. 헌정 질서와 국기 문란에 해당하는 사안을 정쟁으로 몰아가면서 물타기에 치중하고 있다.
박근혜정부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짧은 기간 걸어온 길이지만, 깊숙이 가버려 되돌리기도 쉽지 않다. '국민 통합'은 물 건너가고 분열의 골이 파이고 있다. 지지층만 결집하려 하고 반대표를 던졌던 국민은 외면하고 있다. 실체가 모호한 '종북' 개념을 들이대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도구로 활용하는 조짐도 보이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 소송에까지 나선 것도 무리한 측면이 있다. 정당은 선거를 통해 심판해야 한다는 원리를 도외시해 '공안 통치' '유신 시대로의 회귀'라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정권을 잡는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국민 행복 시대'를 약속했던 것이 집권의 가치였다면 지금의 국정 운영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국민 살림살이는 여전히 피폐하고 이념 대결로 치달아 분열이 심화하고 있으며 민주적 가치가 훼손되는 현실은 한숨만 내쉬게 할 뿐이다. 애초에 내걸었던 공약에 진정성이 담겨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정부와 함께하는 여당 지휘부에도 정치하는 목적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다. 민주주의의 근본적 원칙을 훼손할 수 있는 사안을 호도하는 것이 정치적 신념과 양심에 들어맞는 일인가. 집권 세력이 공존과 협력, 다원주의의 가치를 내버리고 편협한 길을 걷겠다면 국가와 국민은 이끄는 대로 따라갈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에는 저항의 암초가 생겨날 수 있으며 후세에 '퇴행의 시대'로 기록될 수 있음을 명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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