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인도로 명상여행을 다녀왔다. 어떤 이는 잘 꾸민 아름다움으로, 또 어떤 이는 절제미 넘치는 단아함으로 함께 길을 나섰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우리는 진한 감동을 예견이라도 했는지, 출발에서부터 이미 순례자다웠다.
뭄바이에 있는 '도비갓'이라는 공동 빨래터에서는 사람들이 도리깨질하듯 빨래를 돌에다 메치고 있었다. 방법은 영 아니었어도 세탁은 되고 있었고 탁한 물이었는데도 빨래는 희어지고 있었다. 그 기이한 모습에서 문득 내가 세상을 세탁하겠다고 설쳐댄 꼴이 어른거렸다. 차라리 내가 빨래가 되면 어떨까?
언젠가 회사 일에 파묻혀 이사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옛집으로 퇴근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민망해할 줄 모르는 내게 아내는 일과 결혼하지 왜 자기와 결혼했느냐고 앙칼진 원망을 쏟아부었다. 난 오히려 그런 아내가 야속했다. 가족을 위해 미친 듯이 일한 것이 욕먹을 일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여행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산더미 같은 일을 남겨두고 열흘 넘게 자리를 비운다는 것은 내게 일으킨 반란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내가 자리를 비웠어도 세상은 여전히 잘 돌아가고 있었으니, 그동안 나는 착각 속에 살아온 나르시시스트였던 게다. 내 신세가 마치 끓는 물에 살짝 데쳐진 미나리 같았다.
오쇼 라즈니쉬 명상센터는 음악과 춤이 넘실거리는 다이내믹한 곳이었다. 웃으라기에 웃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음악에 맞추어 억지로 웃자니 모두가 미친 사람 같았다. 허리와 발바닥을 긁어가며 웃음을 퍼 올리고, 다른 사람의 웃는 꼴을 쳐다보며 기가 막혀 웃고 그렇게 허기지도록 웃었다. 신기하게도 기쁨이 솟구쳐 올랐다.
마음껏 울어보란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가 보고 싶어 울고, 넘치는 재주를 써보지도 못하고 요절한 동생이 애석해 울었다. 그래도 눈물이 남아, 남을 의식해 척하면서 살아온 나 자신이 서글퍼 통곡했다. 마치 내가 죽은 것 같아 더욱 슬퍼졌다.
화도 풀어보라고 했다. 미워했던 사람들을 향해 마구 욕을 퍼부었다. 악다구니를 쓰며 고래고래 고함도 질렀다. 그러나 그 아우성은 메아리가 되어 나를 향한 외침으로 되돌아왔다.
이젠 춤도 추란다. 나무 등걸처럼 둔탁한 몸을 음악에 맞춰 흔들었다. 어디서 솟은 신명인지 땀이 온몸을 흠뻑 적셨다. 광란하는 군중을 따라 미친 듯이 흔들었더니 드디어 춤도 되었다. 희열이 분수처럼 솟았다. 시원했다. 형식과 체면을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 느낌 그대로 살자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감정의 자연스러운 분출이 나를 해방시켰나? 인도는 나에게 신명나는 탈출구가 되었다. 이젠 나를 찾아 떠나야겠다.
이규석 대구카네기연구소 원장 293l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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