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건강편지] 추억 나누기

사랑하던 사람이 세상을 떠난 후 그 사람이 보고싶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사진을 보거나, 쓰던 물건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를 찾아가 좋았던 시간들을 다시 곱씹어 볼 수도 있겠다. 다른 한 방법으로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누군가를 만나서 그 사람에 대해 같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진료실에 들어서니 종이 가방 한 가득 과일이 들어있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국찬 할매가 다녀가셨다"고 했다. 가방 속에는 정성껏 하나하나 종이로 싼 과일이 가득했다. 천도복숭아, 털복숭아, 자두를 종류별로 넣었다. 과수원에서 직접 따서 씻고, 흠 없는 놈으로 골라 곱게 종이에 싸고 차곡차곡 가방에 넣는 모습, 새벽밥 드시고 버스를 서너 번 갈아타고 이 먼 병원까지 들고 오셨을 할매 모습이 그려진다. '이제는 자기 몸 하나 가누기도 버거운 나이가 되셨을 텐데 이 무거운 것을 어찌 들고 오셨을고? 행여 무거운 가방 들고 오다가 버스에 빨리 오르지 못한다고 기사 아저씨께 핀잔을 듣지는 않으셨을까?'하는 생각에 괜히 가슴이 짠 한 것이 이 과일 쉽사리 먹을 수 없을 것만 같다.

'국찬 할매'의 이름은 '국찬'이 아니다. 하지만 내가 돌보다가 돌아가신 할아버지 성함이 '국찬'이다보니 우리는 그냥 '국찬 할매'라고 부른다. 노부부는 늘 같이 병원에 오셨다. 장성한 자식들은 모두 먼 도시로 떠나고, 두 분이서 시골집을 지킨다고 했다. 과수원 농사를 직접 지으면서. 의사와 환자로 만나 오랜 시간 지내다보면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씩 나누기도 한다. 할아버지는 6'25 전쟁 당시에 혼자 월남해서 이 땅에는 일가친척 하나 없이 외롭게 사셨단다.

가끔은 혼자 월남해서 고생한 이야기, 그러다가 할매(당시에는 꽃처럼 예쁜 처자였다며)를 만난 이야기, 워낙 가진 것 없이 출발을 해서 힘들게 살아온 이야기, 그런 중에 자식들 키우며 알콩달콩 살았던 이야기, 장성해서 멀리 나가 사는 자식들 자랑들까지. 언젠가 "젊을 때는 먹고사느라 바빠 잊고 살았는데 이제 갈 날이 다되니 고향 생각이 많이 납니다.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꼭 한 번 고향땅에 가보고 죽었으면 소원이 없겠는데…."하시더니 결국 그 소원을 못 이루고 가셨다.

외롭고 힘들게 한 세상을 살아와서 그런지 두 분은 어느 부부보다 서로를 의지하고 기대고 사셨다. 그러다가 할아버지가 그만 먼저 세상을 뜨셨으니 할매가 느꼈을 허전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어느덧 9년이 흘렀다.

그런데도 할매는 할아버지 생각이 나실 때마다 나를 찾아온다. 할매는 산소에 성묘가듯 찾아와서는 무덤 앞에서 할아버지랑 빈 대화를 나누는 대신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나와 이야기를 나눈다. 문득 많은 시간이 흘러서 내가 이 세상을 떠난 후 내 가족들은 누구를 찾아가서 나를 추억하며 이야기를 나눌까 궁금해진다.

김성호 대구파티마병원 신장내과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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